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부르시는 노래다. 특히 쓸쓸한 표정으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덩달아 나까지 우울해져 엄마의 이 노래가 싫었다.

어머니들은 대부분 자식을 위해 제 몸 하나 돌보지 않는다. 내 어머니도 그런 분들 중 한 분이다. "살아온 얘기를 쓰자면 소설 10권으로도 모자라다"며 평소 혼잣말처럼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인생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쓸쓸히 노래를 불러야만 했는지 어머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나와 남편 큰 아이
ⓒ 위창남
나는 청해진이라고도 불렸던 완도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섬에서 태어났다. 내 나이 10살 되던 해 해방을 맞이했지만,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기도 했고, 어려서 그런지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다.

내 위로 오빠가 한 명 있었고 밑으로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인해 나는 겨우 초등학교만 마칠 수 있었다.

십대 후반에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해 딸 하나를 낳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그러다 내 나이 스물셋에 한 남자를 알게됐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친절했고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그 사람도 초혼에 실패했던 터라 우린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우리 집안과는 달리 면서기로 안정된 공무원에다 집도 그런 대로 사는 축에 들어 어려움은 없었다.

남편은 내 두 동생들의 학비도 뒷바라지 해주었다. 첫째를 낳고 몇 년 뒤 남편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배를 부리는 선주가 되었다. 그리고 내 나이 서른 하나에 둘째가 태어났다. 나주에 있는 막내 여동생의 집에 사시는 친정어머니가 손자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보냈는데, 그만 그곳에서 둘째 아이가 소아마비란 열병에 걸려버렸다.

하필이면 친정엄마의 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 남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편은 아이를 고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만 허사였다.

▲ 둘째 아이와 함께
ⓒ 위창남
"우리 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올해만 이 섬에서 5명이 넘는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니 그러려니 하고 삽시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벌인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 했다.

어렸을 때 밭일을 빼곤 지금의 남편을 만나 힘든 일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도망치듯 떠나 온 고향 앞에서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야 했다. 소아마비에 걸린 아들을 포함, 세 명의 아이에 집 한 칸은 고사하고 수중에는 돈이 될 만한 것 하나 없었다.

넋 놓고 있기에는 먹고 사는 것이 급했다. 남편과 나는 새벽부터 일을 찾아다녔지만 가족들 끼니 잇는 것이 전부였다. 돈이 되는 일이면 도둑질만 빼놓고 하려고 맘을 먹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저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여린 성격의 남편은 정에 휩쓸려 돈을 꿔주고도 받기는커녕, 오히려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뒤치다꺼리는 내 몫이었다. 남편이 빌려주면 나는 받아오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나오면 뒤에서 들리는 말이 있었다.

"독한 것…."

난 독해져야 했다. 제때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남편, 수술로 인해 치료비는 계속 들어가는 둘째 아이, 중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 막내 여자아이, 모든 걸 그렇게 이고 가야만 했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막내 여동생이 찾아왔다. 표정으로 보아 또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막내 여동생의 남편은 사람은 좋은데 술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예상대로 제부의 일로 돈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안타까웠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아이의 큰 수술이 며칠 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내 여동생은 서운하다며 심한 말을 퍼붓듯이 하고는 떠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내가 일하는 공장에서 둘째 여동생을 통해 접했다. 막내 여동생은 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한참을 지나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몸이 불편한 둘째 아이가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있었다.

항상 둘째 놈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더욱 큰아이에게 정성을 쏟았다. 장남이 잘 돼야 혹시 부모가 죽더라도 몸이 불편한 동생을 돌봐줄 거란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큰아이 일이라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없었는지 큰 아이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기만 했다.

나와 남편은 일요일도 없이 악착같이 일한 덕으로 낡았지만 조그만 집을 샀다. 그렇지만 또 일이 터졌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쌍둥이네가 급하다고 해서 남편이 나 모르게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다 꿔줬는데 그만 쌍둥이네가 도망가 버린 것이었다.

갑작스레 동네 사람들에게 빚을 독촉 받는 빚쟁이가 돼 버렸다. 남편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말이 없었고 난 화병으로 몸져누워야만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알았던지 둘째 녀석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 둘째 아이 재활원 사진
ⓒ 위창남
"재활원? 불편한 애들이 많이 모여 있는 그런 곳 말이냐?"
"알아 봤는데 먹고 잘 수 있고, 또 기술도 가르쳐 준다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
"그래도 돈은 들 텐데…."
"그건 제가 어떻게 알아서 해 볼게요. 올라가는 차비만 주세요."

그 애는 그렇게 옷 몇 가지만 싼 가방을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둘째 아이는 걱정과 달리 오히려 일해서 돈을 탔다며 돈을 부쳐 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난 어느 날 우리에게 많은 빚을 안겨 주었던 쌍둥이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서울 성수동이란 곳에서 식당을 했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찾아갔더니 빚 대신 그 가게를 인수하라고만 했다. 더구나 가게 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까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갑자기 식당이라니 황당했지만, 한 푼이라도 건질 생각에 남은 가족과 함께 서울 성수동으로 왔다. 식당 안에 조그만 방과 다락이 있어서 그곳에서 살림을 함께 했다.

그곳은 공장지역이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 손님이었다. 평소 음식솜씨가 있던데다, 한참 일하는 총각들이라 밥도 마음대로 더 먹을 수 있게 했더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침 7시에 문을 열면 새벽 2시가 돼야 끝날 정도로 장사는 잘 됐다. 저녁에는 술 손님까지 있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천호동에 있는 화실에서 만화를 배우던 둘째 아이까지 퇴근해서 청소를 할 정도로 다같이 노력한 끝에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몸에 이상이 왔고 남편은 식당을 계속했다간 사람 잡겠다며 그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아쉬웠지만 욕심을 부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둘째 아이가 만화를 배우고 있는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화실 근처로 전세를 얻었고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에 주방일 하는 사람으로 들어갔다.

둘째 아이도 화실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걱정거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편안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92년이었다. 결혼한 큰아이가 새로 시작한 사업은 구운 소금을 파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됐지만 잘 된다니 참으로 기뻤다. 큰 아이는 그동안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열심히 그리고 크게 일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신의 시기심이었을까? 한 방송에서 '소금열풍'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내용인 즉 죽염이 과연 좋으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죽염이라고 해도 무턱대고 먹으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방송을 보고 걱정이 돼서 큰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일주일만에 며느리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그저 흐느낌뿐이었다. 하필 수금을 앞두고 그 방송이 나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들의 빚을 갚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지만 워낙 큰 손실이라 한계가 있었다. 큰 아이는 의욕을 잃었고 나와 남편은 그걸 보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내려가세."
"?"
"자네도 아프고 하니 우리 두 사람 고향으로 가세."

그렇지 않아도 관절염에다 고혈압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나는 그러자고 했다. 어쩌면 이 모든 현실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함께 고향에 민박을 하기로 하고 집을 지었다. 그즈음 다른 집들도 민박으로 인해 재미를 보고 있었고 큰 돈은 아니더라도 두 노인이 자식 의지하지 않고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고생하며 막 집을 짓고 이제 민박 손님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던 차에 IMF가 터졌다. 막막했지만 어떻게든 또 사는 게 인간인지라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
"왜,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냐?"
"엄마, …진규가 죽었어."
"누가 죽어?"
"진규가… 진규가 죽었다고…."

첫 남편과 결혼해 낳은 딸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불행히도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을 했다. 두 아들을 의지하며 열심히 살던 딸의 첫아이가 군대에 갔다 제대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키도 크고 머리도 좋고 뭐 하나 빠진 것이 없는 녀석이었는데… 할머니인 내가 아무리 슬프다고 자식 잃은 딸에게 비할까.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왜 유독 나에게만 이런 슬픔과 불행이 오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라고 모든 슬픔도 세월 앞에 하나둘씩 묻혀져 갔다.

큰아이는 사업의 꿈을 접었다. 그래도 친구관계는 잘 했는지 전에 도와줬던 친구 중 하나가 가구 및 주방가구를 만드는 큰 회사로 성공해서 그 회사에 간부로 들어가 있다. 늘 마음에 걸렸던 둘째 아이는 아무 도움 없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열심히 살고 있어 또한 마음의 짐을 덜어 버린 느낌이다.

큰 딸아이는 얼마 전에 재혼했다. 힘들게 새 출발을 하는 딸 아이가 앞으로는 행복했으면 하고 바란다. 나에겐 크게 성공한 자식들은 없어도 그저 열심히 살아가 주니 그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건강하고 형제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제일이라고 한다. 정말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의 한가운데에 계셨던 어머니의 칠순이 이번 4월 26일이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몇 년을 참지 못하고 먼저 가셨다.

어머니의 팔뚝은 팔뚝 같지가 않고 두껍고 단단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다. 고생하며 살아오신 흔적일 것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본받고 존경하는 사람은 멀리 있는 위인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부모님이 되어간다. 지금 나의 파랑새는 엄마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 원고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