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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에미야, 친정에선 차례를 안 지내냐?”
“아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애비가 하도 제사 지내지 말자고 그래서.”
“……?!”

며칠 전,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남편이 언제 또 전화를 걸어서 차례를 지내지 말자고 말씀드렸나 봅니다. 문득 새해 초에 남편과 어머님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설에 차례 지낼 거예요? 아버지도 완쾌되지 않아서 지내고 싶지 않은데.”
“글쎄다. 아버지는 오랜만이라 지냈으면 하시던데.”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보니, 시어머님은 며느리가 아들한테 차례를 지내지 말자고 꼬신 걸로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못된 며느리가 들어와서 조상님 제사까지 못 모시게 한다고 원망을 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차례를 지내는 형식과 내용에 대해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부모님 앞에서 차례에 대한 어떠한 의견도 말씀드린 적이 없었기에 어머님의 오해에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반신 마비로 4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시면서도 시아버님은 명절이나 조상님 제삿날이 되면 어김없이 남편을 재촉하셨습니다.

“병원 안 와도 되니, 고향 가서 차례를 지내라. 성묘를 해야 후손이 잘 되는 거야.”

그때마다 남편도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셨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되신 걸 보면, 조상님 은혜 같은 건 없어요. 전 아버지가 나아서 퇴원하실 때까지 제사 지내지 않을 거에요.”

그 날, 저녁 퇴근하는 남편을 붙잡고 다짜고짜 따졌습니다.

“어머님이 내가 차례 지내지 말자고 당신 꼬시는 줄 아시네. 난 너무 억울해.”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님께 전화드렸는데, 친정에서는 차례 안 지내냐고 물으시잖아. 꼭 내가 당신한테 제사 지내지 말자고 해서 당신이 제사 안 지내려 하는 것처럼 보이시나 봐.”
“그건 오해야. 나는 내 생각이 있어서 차례를 지내지 말자고 한 거야.”

사실, 남편은 결혼하기 전부터 차례나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해왔습니다. 벌초나 성묘 가는 것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납골당에 조상의 유골을 모시는 것도 탐탁치 않아 하고 그냥 화장해서 강이나 산에 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인지 나의 생각도 남편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조상을 모시는 데 대한 남편의 이런 생각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내 생각은 명절 때마다 겪게 되는 일을 통해서 조금씩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대개의 가정이 그렇듯이 친정에서는 명절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늘 여자들 몫이었습니다. 호사스럽게 차례를 지내지 않더라도 제삿상에 올라가는 기본적인 음식과 많은 가족, 친지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전을 부치거나 만두, 송편을 빚는 일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남자들은 한가로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기 일쑤였고 그도 아니면 잠을 잤습니다. 끼니 때가 되면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 와중에도 꼬박 상을 차려주어야 했고, 식사가 끝나면 또 산더미같은 설거지를 해야 했습니다.

낮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자들은 밤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 명 두 명 나가버렸습니다. 온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그새 못 나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명절이 기다려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겁부터 났던 건 바로 이렇게 엄청나게 늘어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래서 ‘명절증후군’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차례를 지내지 말자는 생각은 아닙니다. 명절 준비하는 데 남자들이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그리 나쁠 것도 없으리라 봅니다. 같이 둘러앉아 전도 부치고 예쁘든 못 생기든 만두나 송편도 함께 빚으며 여자들이 설거지 하는 동안 걸레질도 해 주면 서로 더욱 즐겁고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오해의 고리가 풀리지 않아서 다시 남편한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차례를 안 지내려고 해?”
“굳이 차례를 지낼 필요가 어딨어? 조상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되잖아.”
“그래도 아버님이 4년만에 퇴원하셨고, 오랜만에 차례를 지내고 싶어하시는 데 당신이 그냥 양보할 수도 있잖아?”
“나도 알아. 하지만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거야. 이번에 차례 지내면 앞으로 계속 제삿날 내려오라고 하실 거야.”

남편의 말에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융통성이 부족한 듯했습니다.

“아버님 몸도 불편하신데 당신이 그렇게 반대하면 마음의 병까지 얻으시겠다.”
“…”
“이번엔 그냥 지내는 걸로 하자. 조금씩 바꿔가도 되잖아. 그리고 나중에 호주가 바뀌면 우리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해도 될 것 같고.”
“알았어.”

조상을 기리고 모시는 건 대대로 전해내려온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입니다. 하지만 오랜 관습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설령 의견 차이가 난다고 해도 제사나 명절을 계기로 가족 친지들이 모여 정답고 행복한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조상 모실 줄 모르는 놈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다”며 종손으로서 문중의 제사와 묘지 관리 등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식에게 화가 난 아버지가 소송을 통해 상속 재산을 되돌려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이야 아버님과 소송까지 가는 일이야 없겠지만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오늘 아침, 시어머님께 전화로 “어머님. 차례상 준비는 어떻게 해요? 저희가 시장을 봐 갈까요?”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님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날도 추운데 애들 감기 걸릴라. 장은 내가 간단히 보마.”

작은 양보를 했더니 어머니는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제사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평생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오신 시부모님에게 일방적인 ‘중단’은 혼란과 오해를 가져올 것입니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더 많이 대화해 마음의 일치를 보기까지 제사에 대해서는 시부모님의 편을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지키는 열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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