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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영웅·호걸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역사의 도도한 흐름 만큼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청산을 반대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역사의 거친 파도에 떠밀려 어디론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인류역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크게 두가지 부류다. 첫 번째 부류는, 역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느끼면서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는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 후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의 죄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죄인 중 대표적인 인물 한 명으로 청나라∼중화민국 시기의 원세개(袁世凱, 1859∼1916)를 들 수 있다. 중국어로는 '위안스카이'라고 불리는 이 원세개가 어떠한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임오군란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은 '원세개'

중국 허난성 출신인 원세개는 처음에는 문관이 되기 위해서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과거에 실패한 후 그는 마음을 바꿔 군인의 길을 걸었다. 어느 '군관학교'에 가서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경군통령(慶軍統領) 우장칭의 부하가 되어 본격적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군인 수업'을 받던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으니, 바로 조선에서 임오군란(1882)이 발발한 것이다. 원세개는 임오군란 진압군의 일원이 되어 조선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겪던 구한말의 비극이 원세개에게는 출세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1884) 후 그는 서른도 안된 나이로 총리교섭통상사의에 취임하여 청나라의 대한정책을 조선 현지에서 총괄하게 되었다. 이후 그가 보여준 그 오만무도함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매우 악명 높은 것이었다. 조선 국왕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갖가지 조작사건으로 고종의 폐위까지 도모했던 인물이 바로 그였다. 본국의 리홍장을 대신하여 그가 조선에서 행한 극도의 내정간섭은 수천 년 한중관계에서 전무후무한 일로 평가받을 정도로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기세 등등하던 원세개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인 1894년 6월 21일(음력) 신변의 안전을 위해 본국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일본 군대가 자기 나라 군대를 압박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조선의 현지책임자라는 사람이 가장 먼저 도주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달아난 원세개는 중국에 가서도 여전히 출세의 길을 달렸다. 그는 중요한 순간 순간마다 절묘한 배신으로 국면을 전환하고 또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무술변법(1898) 때에는 동지들을 배신하고 개혁을 좌절시킨 후에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산동순무로 승진했다. 그리고 1901년 상관인 리홍장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보여준 배신 행각은 신해혁명 때 극치에 달했다. 신해혁명(1911) 발생 당시, 그는 진압책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혁명파와 내통하여 마지막 황제 푸이를 퇴위시키는 데 가담했다. 그리고 1912년 2월에는 쑨원(손문)의 뒤를 이어 중화민국 임시총통의 자리에 올랐지만, 얼마 안 가서 쑨원마저도 배신하고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철저하게 변신과 배신으로 일궈낸 '인간승리'였던 것이다.

부르주아혁명이라고도 평가받는 신해혁명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청산하자는 혁명이었다. 지금의 한국처럼 그 시기 중국에서도 '과거청산'이 하나의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신해혁명의 이념은, 바로 전제정치와 봉건주의를 청산하고 공화정치와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수천 년간 황제정치의 굴레에서 신음해온 중국인들은 이제 그 지긋지긋한 '과거'를 청산하고 싶어했다.

원세개처럼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 자신이 신해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또 그 틈을 타서 임시총통까지 올랐기 때문에, 그는 시대의 변화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수억 명 중국인들의 열망을 무시하고, 내친 김에 황제까지 되려고 했다. 과거의 황제정치 시대로 회귀하고자 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 스스로 반혁명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과거의 황제정치로 복귀하되, 구 청나라 황실에 옥새를 돌려주는 게 아니라, 원씨 자신의 황제국을 새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외세까지 끌어들인 그의 야욕

1914년 5월 중화민국임시약법을 폐지한 그는 스스로 봉건독재적인 대총통의 지위에 올랐다. 사실상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황제라는 타이틀까지 얻고 싶어했다. 그래서 벌인 것이 그 유명한 원세개의 제제운동(帝制運動)이다. 황제가 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원세개의 욕심은 즉각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수억 명의 중국인들이 원세개 일개인의 야망을 들어줄 리 만무했던 것이다. 힘이 달린 그는, 국내에는 우군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외세와 결탁하였다.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 등을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1915년에는 그 유명한 일본의 21개조 요구까지 들어주었다. 오로지 황제가 되어보겠다는 욕심에 자기 조국의 막대한 이권을 일본 제국주의에게 넘겨준 것이다.

결국 그는 1915년 12월 11일 참정원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 역시 '꿈'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꿈 뒤에는 엄혹한 현실이 이어지듯이, 원세개는 곧장 엄혹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세개를 반대하고 황제제도를 반대하는 태풍이 들판의 불처럼 전(全) 중국에 확산되어 간 것이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그를 지지하던 서양 열강들마저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인기 없는 원세개를 지지하는 것이 자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민적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는 데다가 철석같이 믿었던 서양열강까지 등을 돌리자, 원세개는 홀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수억 명이 다 반대하는데, 자기 혼자 밀어붙인다는 것이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그는 마치 힘없는 종이배와도 같았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들어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 그는 황제 즉위 3개월 만인 1916년 3월 22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역사가 그에게 내린 형벌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심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려 신경성 피로와 요독증이라는 질병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인 6월 6일 그는 급사하고 말았다. 57세의 나이에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한때는 조선을 상대로 극악무도한 간섭을 일삼았고, 무술변법 때에는 동지들을 배신하여 서태후의 신임을 얻었으며, 또 신해혁명 때에는 황제를 배신한 덕분에 임시총통까지 되었으며, 그 후에는 혁명파와 국민마저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보려 했던 원세개. 역사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맨몸으로 맞선 원세개, 그는 황제가 된 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 요독증이라는 '남에게 말하기 힘든 병'에 걸려 급사하고 만 것이다.

비참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한 말로(末路)였다. 그렇게 기회주의적이던 사람이, 막판에 욕심에 눈이 멀어 역사의 물결에 맞서다 떠밀려 가고 만 것이다.

원세개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런데 요즘 한국에는 스스로 원세개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는 뒤늦게나마 과거청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 늦은 시기에 무슨 과거청산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종기가 오래 곪았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50년이나 된 종기를 그대로 둔다면 오히려 수명을 더 단축시키지 않겠는가.

한국의 과거청산은, 뒤늦게나마, 한국이 더 건강해지고 더 오래 살기 위한 처방이다. 만약 과거청산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 목표인 민족통일과 세계화를 결코 이룩할 수 없다. 친일잔재, 국가보안법, 과거 국가기관의 범죄 등을 그대로 방치하고서, 어떻게 더 건강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과거청산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절체절명의 과제이며, 무엇보다 그것은 역사의 준엄한 명령이다.

그런데 일부 극소수가 이 역사의 명령에 감히 도전하고 있다. 과거에 누렸던 그 알량한 떡고물이 못내 아쉬워서,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과거청산을 반대하며, 또한 갖가지 방법으로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2002년 및 2004년의 촛불시위를 통해 역사의 변화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마 안 되는 입김으로 5000만 촛불의 뜨거운 열기를 끄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허황된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어떤 영웅·호걸도 감히 역사의 물결 만큼은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는 '빨갱이'를 잡는다면서 눈에 불을 켜던 그들, 이제는 그 자신들이 한국사회의 '빨갱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그들,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소설 '꺼삐딴 리'의 이인국처럼 신속히 변신하는 것 뿐이다. 과거에 자신들이 박해하던 '빨갱이'들처럼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면, 기회주의자가 되어도 좋으니, 그들은 이제라도 역사 앞에 순응해야 한다.

역사의 거친 파도 앞에서, 그들이 타고 있는 종이배가 생존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사는 길은, 종이배를 버리고 쾌속 여객선으로 옮겨 타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거친 파도에 맞설 것이 아니라, 그 파도를 타고 역사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의 변화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단 한가지다. 급사한 원세개처럼 요독증에 걸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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