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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극우당 국민전선(FN)은 프랑스의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의 출신을 문제삼으며 지단의 아버지가 아르키(harkis)였다고 공격했었다. 이에 대해 지단은 일간지 뤼마니떼(l'humanite)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 아버지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자랑스러운 알제리인이다'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다.

아르키. 현지에서 징발된 회교도 보충병, 특히 알제리 독립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알제리인을 일컫는 아르키는 그래서 알제리인들에게는 '배신자'요, 프랑스인들에게는 '조국을 등진' 용병에 불과한, 참으로 불명예스런 이름이다. 알제리 전쟁에서 자발적이건 강제에 의해서건 아르키 50만 명이 모집됐으며 이들 중 15만 명이 프랑스군대 철수 이후 알제리 체제에 의해 학살됐다.

참혹한 역사의 귀결이었을까.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한 132년의 긴 세월과 또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피묻은 전쟁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아버지 세대를 거쳐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 2세들이 프랑스를 향해 증오를 키우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전쟁은 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지난 10월 14일, 아르키와 그들의 가족으로 구성된 1962-재향군인송환자협회(ARRAC)가 파리 법원에 불특정 인물 X를 상대로 반인도범죄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은 은연 중에 알제리전쟁 당시의 프랑스 제 4, 5공화국 정부와 알제리 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지난 11월 5일 사건 담당 알랑 부스께(Alain Bousquet) 변호사는 밝혔다.

소송은 동시에 지난 10월 23일 출판된 조르주-마크 베나무(Georges-Marc Benamou)의 저서 '프랑스의 거짓말, 알제리전쟁의 회고(Un mensonge francais. Retours sur la guerre d'Algerie)'를 문제의 정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이 책은 알제리전쟁 종결에 합의하는 1962년
3월 19일 에비앙(Evian)휴전협정 서명을 가속화하려 했던 드골(de Gaulle) 정권에 의해 아르키와 알제리 출신이면서 알제리 독립 후 프랑스로 철수한 프랑스인들을 말하는 피에-느와르(pieds-noirs)들이 의도적으로 희생됐다고 증언해 동요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번 소송은 특히 1960년에서 1969년까지 드골 정부의 총리를 지낸 피에르 메스메르(Pierre Messmer, 87세)를 구체적으로 지목해 눈길을 끈다.

ARRAC에 따르면 에비앙협정에 따라 1962년 7월 3일 알제리가 독립되는 날까지 프랑스는 알제리 내 프랑스 관할 지역의 질서유지에 책임이 있었다. 3월 18일부터 무장 해제된 프랑스 군대의 지방 고용인과 아르키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르키들에게 돌아온 것은 대량학살 뿐이었다. ARRAC는 알제리 정권의 아르키 대학살을 묵인한 프랑스 정부가 '반인도범죄'의 대상이라며 당시 군, 행정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메스메르는 이와 관련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지난 5일 수요일 라디오 유럽-1(Europe-1)을 통해 밝히고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전쟁은 결코 깨끗하지 않다. 그것은 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고 말해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는 필연적임을 시사, 자신에 집중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메스메르는 또 에비앙협정 서명 이후 알제리에서 수만 명의 아르키가 살해된 사실은 인정했지만 프랑스군대는 2만여 명의 아르키와 그 가족들의 본국송환을 준비했다며 마지막 전투에서 프랑스군대가 알제리 보충병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고 있다.

공소시효 없는 반인도범죄, 그러나...

그러나 현재 프랑스에서 반인도범죄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과 1994년 이후 일어난 사건으로 한정하고 있고 더구나 알제리 전쟁 기간동안 저질러진 모든 범법행위는 1968년 7월 31일에 발효된 사면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제기된 이와 유사한 다른 소송들도 꾸준히 '증거조사거부' 혹은 '공소기각(公訴棄却)' 결정의 대상이 돼왔다. 실례로서 지난 2001년 8월 30일, 알제리출신송환프랑스인협회와 함께 9명의 아르키가 파리 법원에 역시 X를 상대로 하는 반인도범죄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으나 기각됐고 2002년 3월에도 피에-느와르 11가족이 알제리전쟁 휴전이후 실종된 가족 친지들을 찾기 위해 같은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소송의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도 뚜렷한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에 대해 '싸움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밝힌 부스께는 '아르키들의 소망은 명예회복이고 오늘날, 프랑스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며 이번 소송이 이전처럼 끝나지는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1945년 나치(nazis) 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그 법정이 반인도범죄 최초의 법정으로서 최근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모리스 빠뽕(Maurice Papon, 93세)을 꼽을 수 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지롱드(Gironde) 도청 사무국장을 지낸 빠뽕은 2차 대전 당시 어린이를 포함한 1만1000명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비시(Vichy)정부와 함께 대독 협력 사실이 발각돼 반인도범죄 명목으로 보르도(Bordeaux) 중죄재판소에 회부됐었다.

1997년 10월 8일 시작된 이 소송은 1999년 10월, 빠뽕이 10년형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됐지만 이것은 당시 87세의 빠뽕에게는 종신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상 처음으로 국가 고위관료를 심판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빠뽕은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후에 법의 심판을 받은 전범으로 기록돼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도범죄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비록 3년 동안의 수형 생활 끝에 지난해 9월,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의 몸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프랑스인 55% "알제리에 사죄할 필요 없어"

한편, 대다수의 프랑스인(55%)은 132년에 걸친 식민정책에 대해 프랑스가 알제리에 공식적으로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여론조사기관 CSA가 일간지 라프로방스(La Provence)를 위해 지난 10월 15일과 16일 양일간 18세 이상의 프랑스인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프랑스가 알제리에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해야 한다고 평가한 프랑스인이 37%이고 55%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또 43%의 응답자는 1830년에서 1962년까지 132년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했을 당시, 알제리 상황이 더 나았다고 대답했으며 36%는 알제리 독립 이후가 더 낫다고 했으나 21%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인 10명 중 7명(66%)은 알제리 전쟁이 속 시원히 해명되지는 않았다고 했으며 반대 의견은 23%에 불과했다. 이밖에 68%의 응답자는 알제리전쟁 이후 아르키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가 부당했다고 평가했으며, 정당했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2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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