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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그간의 활동내용을 묶어 8일 '대국민발표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보고서 3권에 실은 '죽음을 죽인 사회는 어떻게 가능했나' 제하의 글을 통해 해방 이후 발생한 다양한 형태의 의문사들을 재구성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의문사위와 한 교수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독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다만 분량이 많아 6회분으로 나눠 싣습니다...편집자 주


▲ 지난 2001년 11월 5일 오후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전국합동위령제 및 전국 유족회 재창립 대회에서 억울하게 쓰러져 간 이들을 위한 진혼굿이 펼쳐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국가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폭력의 독점자이다. 그런 국가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할 때, 시민들은 정말로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이 지속될 경우 때리는 쪽 뿐 아니라 맞는 쪽도 익숙해진 상처를 남기게 된다.

1백만의 민간인학살은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가해자인 국가는 국가대로 폭력의 독점만이 아니라 폭력의 행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피해자인 시민은 시민대로 국가기구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민간인학살과 시인 김수영의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

▲ 한국전쟁 초기 형무소 수감자들이 트럭에 실려 학살현장으로 끌려가는 모습. 1950년 7월 29일 영국 잡지 <픽처 포스트>에 실린 사진으로, 이 잡지사 편집장은 이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 <부산일보> 김기진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완장찬 사람들의 손가락질 하나로 왔다갔다하는 처절한 학살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완장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국가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은 과대성장한 국가기구와 발달이 위축된 시민사회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갖고 있었는데 이런 구도는 민간인학살을 거치면서 극도로 악화되었다.

민간인 학살의 광풍이 휩쓸고 간 한국사회를 다시 강타한 것은 부역자 처벌과 연좌제였다.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거짓 방송을 통해 시민들을 속이다가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친 이승만 세력은 서울로 돌아온 뒤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좌익에 협력한 사람들로 서슬 푸르게 몰아쳤다.

그리고 좌익 활동에 연루된 사람들이나 월북자 가족들은 연좌제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을 받아야 했다. 1969년 홍성경찰서장 명의의 담화문에 나오는 간첩식별법에는 "과거의 악질 부역자 처단자 가족과 남몰래 가까이 교제하는 자"가 들어있다. 민간인 학살의 유가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간첩으로 몰릴 수 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민간인 학살의 유가족들은 심지어는 자기 자식에게까지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잃은 자식에게 살아남은 어머니는 '네 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학살당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이 땅에 살기 위해 부모를 처형한 우익반공단체의 열성 간부가 된 아들의 심경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1천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공리 사건의 경우, 유골은 있되 유족은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막힌 현실은 아직도 이 땅의 유족들이 겪는 공포와 체념의 벽이 얼마나 높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뒤틀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학살은 한국의 사회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1960년대 초반 시인 김수영은 한국사회를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평한 바 있다. 최근 한 휴대전화의 광고는 '묻지마, 다쳐'라는 카피를 사용하여 큰 히트를 했다. '묻지마, 다쳐'의 사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노령의 진보적인 어른들은 '똑똑한 사람들은 그때 다 죽고, 쭉정이만 남았다'라는 말을 하고, 군사정권 시절 '나서지 마라'라는 말은 부모들이 대학생이 된 자식들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이었다.

한국사회에 오랜 기간 군사독재가 유지되고, 또 군사독재가 물러난 뒤에도 반공주의 보신주의가 횡행하는 것은 학살의 무덤 위에 한국사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또 가족의 생존과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신가족주의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전도 역시 학살이 남긴 상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방위군사건,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학살

▲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NARA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민간인 학살의 분위기 속에서 인명경시 풍조는 극에 달했다. 아니, 민간인 학살은 불법적인 일도, 부도덕한 일도 아니었다. 빨갱이를 잡아 죽이는 일은 반공을 표방한 대한민국에서 차라리 성전(聖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 예로 해방 직후 대표적인 우익 정치깡패로 활동한 김두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좌익이 만든 국군준비대를 습격한 사건에 대해 서술하면서 "태릉에 쳐들어가서 1천3백 명을 학살한 다음, 죽창으로 가슴을 박아 일일이 사망을 확인하고, 건물에 쓸어넣고 소각하였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군정 하의 서울 근교에서 아무리 좌익이라 해도 1천3백여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한국사회에서는 '빨갱이'를 몰살시켰다는 무용담이 자랑스럽게 통용될 수 있었다. 민간인 학살과 반공정치 속에서 사람의 목숨에 대한 존중은 설 자리를 잃었다.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이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빨갱이들이었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런 가해자들의 변명조차 무색하게 만든다. 가해자들은 민간인 학살은 그래도 잠재적인 적을 죽인 행위이며, 이런 예방조치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이런 주장에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잠재적인 적뿐 아니라 자기 편도 너무 쉽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일종의 예비군으로 소집한 청년 최소 5만 명을 불과 석달 만에 굶겨 죽이고 얼려 죽이고 병들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 다른 학살이었다.

이 사건은 다른 학살사건처럼 방위군 병사들을 총을 들고 죽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보급품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해 수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게 한 사실상의 학살사건이다.

잠재적인 적이 아닌 아군을, 그것도 수만 명씩이나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당시 국가기구, 그리고 국민방위군의 호송을 책임진 우익청년단체 지도부의 인명경시풍조가 어떤 지경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자원에 대한 태도가 이런 정도였으니 잠재적인 적이나 통비분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민간인 집단에 대해 적극적인 학살을 벌인 것은 어쩌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것은 죽음을 죽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1950. 9. 27. 전주. 학살된 시신의 사진만 남아 있고 가해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 NARA
1백만 명의 민간인학살, 이 죽음은 슬퍼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런 죽음이었다. 민간인학살 자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백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이것은 죽음을 죽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수십만명의 죽음을 50년간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광범한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이 땅에서 피해자도, 가해자도, 유가족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전체 구성원은 모두 사람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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