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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에서 강대원 기동수사대장이 연쇄살인범 유영철씨 검거와 관련한 기자브리핑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3년 9월 24일 10시 10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단독주택 담을 넘어 현관문으로 범인이 침입했다. 그는 한 대학 명예교수 이모(73)씨와 부인 이모(68)씨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달아났다. 이것이 비극적 살인극의 서막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약 10달 후에 잡힌 범인은 이미 무려 18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이미 살해한 뒤였다.


이번 연쇄살인 사건을 두고 경찰의 수사력 부재가 도마에 올랐다. 이런 수사 방식이 경찰이 표방하던 과학 수사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 시민들도 많다. 늦게라도 범인을 검거한 경찰의 공은 치켜세워야겠지만 그것으로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덮을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실종신고 접수 없어서 못 잡았다?

18일 경찰은 피해 여성들의 직업적 특성상 실종 신고가 접수되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달랐다. 피살자 중 3명의 친구와 가족이 이미 실종 신고를 접수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모(24)씨는 3월 24일 친구가 실종 신고를 접수했고 한모(24)씨와 김모(26)씨도 지난달 4일과 28일에 실종 신고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3월 김씨의 신고가 처음 접수됐을 때는 경찰청이 부천과 포천 지역에서 잇달아 일어나던 초등생·여중생 실종 및 살해 사건의 비난 여론에 밀려 2월 17일부터 5월 26일까지를 ‘민생침해소탕 100일 계획’으로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천명해 놓은 시기였다.

당시 경찰청은 ‘100일 계획’을 실종자 수사에 대한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대외적인 공표와는 다르게 공염불로만 끝난 셈이다.

한편 20일 서울중앙지검 등 6개 주요 검찰청 강력 부장들은 유영철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연쇄살인 등 흉악 범죄는 검사가 직접 지휘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에서 검찰로 이름만 바꿔달았지 올 초 민생침해소탕100일 계획과 유사한 포맷이다. ‘사후약방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18일 오후 2시 40분경 서울 마포 기동수사대 현관에서 수십명의 경찰들에 에워싸인 채 유씨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잡아 준 범인도 놓치고...

경찰은 지난 14일 밤 보도방 업주들로부터 신고를 받고 15일 새벽 신촌에서 범인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유영철을 잡은 것은 보도방 업주들이었다. 검거 당시 경찰은 다른 곳에 가 있었고 보도방 업주들이 달려들어 유씨를 붙잡았다. 뒤늦게 온 경찰은 유씨가 광고 전단을 삼키려는 것을 보고서야 유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19일 SBS의 보도에 따르면 이마저도 관할 지구대와 기동수사대는 유씨의 신병을 두고 한 시간 동안이나 경찰끼리 논공행상을 벌이며 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찰청 김병철 형사부장은 20일 기자들과의 브리핑에서 보도방 업주들과 함께 피의자를 검거한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특별한 비행이 없다면 누구에게나 제보를 받을 수 있다”며 “그러나 보도방 자체가 불법이므로 사건 뒤 입건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렇게 잡은 유영철이 간질을 일으키자 경찰은 포승줄을 풀어주었고, 유씨는 기동수사대 계단을 통해 중앙 현관으로 빠져나왔다. 경찰은 밤이라 인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형사들로만 구성된, 경찰 최고의 수사 전담반이라는 기동수사대가 잡아 놓은 범인을 청사 내에서 놓친 점은 비난을 살 만한 일이다. 12시간 후 영등포에서 범인을 검거하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은 또 다른 미결사건으로 남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경찰이 유씨를 검거할 기회는 올해 초에도 두 번이나 있었다. 올 1월, 이미 4건의 범행을 저지른 상태였던 유씨는 신촌의 한 찜질방에서 절도혐의로 검거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또 유씨는 경주에서 불심검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관할경찰서는 당시 유일한 증거였던 혜화동 사건의 CCTV화면과 ‘버팔로’ 신발만으로 유씨를 범인으로 몰기에 무리가 있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막상 유씨를 검거하고 나서야 혜화동 사건 CCTV 화면 뒷모습이 범인 검거의 결정적 증거였다고 밝혔다. 결국 증거로 범죄를 본 것이 아니라 범인을 보고 증거를 찾은 셈이다.

진술 아니었으면 ‘연쇄살인’ 밝힐 수 있었나?

경찰의 수사는 유씨의 자백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때문에 유씨가 경찰을 가지고 논다는 비아냥마저 들리고 있다. 경찰이 유씨를 체포한 이유는 유씨가 7월 초 역삼동의 한 여관에서 출장 마사지사를 감금 폭행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유씨는 위의 혐의를 부인하고 외려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고 밝혔다.

만약 유씨가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지 않았다면 경찰이 유씨의 범죄를 밝힐 수 있었냐는 것이 의문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또한 경찰은 유씨가 서울과 인천에서 무차별적인 살인극을 벌이는 동안 공조 수사에도 미흡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잡고 욕먹는’ 상황이 벌어지자 현재 경찰은 하루 정례 브리핑 2회만을 제외하고는 언론과의 라인을 극도로 축소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한국 경찰의 검거율은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일선 경찰들은 당장의 실적 때문에 실종 신고 등은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이번 사건에서도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있다"며 "현실적 여건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장기 미결 사건의 경우 수사가 길어지다 보면 결국 수사를 할 수 없다"며 "초동수사 능력과 전문적 수사관을 양성하고,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수사할 수 있는 전담반의 설치가 요구된다”고 곽 교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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