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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기독인(基督人)으로 산다는 것

생각해 보면 한국 기독교-이 글에서는 개신교에 국한해서 말하고자 한다-의 성장은 확실히 경이로운 데가 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불과 1세기여만에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기독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비록 여기서의 성취란 교회, 교인, 목회자, 헌금 등 주로 양(量)적인 측면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불교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을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 영향력 등의 요소를 고려할 때 다른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대단히 높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최근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고 교회세습 등의 각종 악재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교세가 다소 위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여전히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처럼 각종 예배-수요예배, 주일 낮 예배, 주일 밤 예배, 구역예배 등-와 기도회-금요 기도회, 신년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꼬박꼬박 헌금-헌금의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이고 각종 감사헌금, 주일헌금, 건축헌금 등이 있다-을 내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그 짝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로 대표되는 한국개신교의 형식은 이미 자리가 잡힌 지 오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기독교인의 수효(數爻)가 전 인구의 4분의 1에 가깝고 더욱이 그들 중 상당수가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열심인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더 나아가 한국사회가 이른바 '하나님 나라'에 그다지 가까워진다고 생각되지 않는 점이다.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설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매주 교회에서 듣고 배울 성도들의 삶은 어째서 자신과 가족들만 생각하는 데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성도들의 신앙은 왜 기복주의에 머물러 있고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시선은 협소하고 닫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성도들조차 교회 내의 봉사를 소중히 여기고 다른 무엇보다 전도와 선교에 대한 비전을 불태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선의(善意)가 개인윤리에 매몰되어 주로 자선(慈善)과 구휼(救恤)의 형태로 나타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의 본질(本質)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여기서 구원이라 함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영적인 구원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육적인 문제의 해결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성경 미가서 6장 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이야말로 기독교 정신을 관통하는 본령(本領)이자 정수(精髓) 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과 공의(公義)의 종교이다. 그리고 사랑과 공의는 한몸과도 같으며 서로가 서로를 강렬히 필요로 한다. 즉, 온전한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는 공의라는 수단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공의의 실천을 위해서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육적인 문제의 해결은 사랑과 공의의 행복한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째서 그런지 예를 하나 들어보자! 큰 도시의 뒷골목 중에 유독 범죄가 빈발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강,절도가 출몰하고 각종 성폭력 사건도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데 선한 의지를 품은 한 성도가 그 골목에서 강도 만나 돈을 빼앗기고 폭행당해 쓰러져 있는 행인(行人)을 부축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후 정성껏 치료하고 얼마간의 차비도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성도는 선행을 한 것임에 틀림없고 그 행위의 바탕은 행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들이 그 골목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을 근절시키거나 줄일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은 매우 회의적이라 할 것이다.

그 골목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근절하거나 억제할 대책은 단기적으로는 정부에서 경찰력을 더 많이 투입하여 지속적인 방범활동을 펼치고 보안등을 확충하는 등의 방법일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범죄가 상당 부분 실업률의 상승과 상관 관계가 있는 만큼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가족의 해체를 지속적으로 억제하는 등의 방법일 것이다. 특히 위에서 지적한 장기적인 대책은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예와 같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역시 사회구조이며 그 중 중핵(中核)을 이루는 것은 정치체제와 경제구조-가치의 생산과 분배방식-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연결고리를 모르거나 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국 기독교가 정신적 불구(不具)라는 비판을 받으며 온갖 병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작금의 현실도 사랑과 공의(公義)가 병행하여야 한다는 진리에서 멀어진 탓이 아닐까! 한국 기독교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공의라는 기독교의 중요강령(綱領)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자, 그렇다면 추상(抽象)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공의(公義)는 어떻게 구체(具體)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오는가? 공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은 경제구조-가치의 생산 및 분배방식-의 근본적 변화이며 이는 가치생산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를 실질적으로 향유하는 방향으로의 변화이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분배라고 할 때 정치가 지향할 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치를 생산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를 정당하게 분배받는 경제구조와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며 정치는 정당하고 효율적인 생산구조와 분배방식을 조직하는 수단이라 할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한국의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지향해야 할 공의(justice)는 자명하다. 그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경제구조와 정치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와 발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3가지 절차와 단계가 필요하다.

첫번째는 성경이 말하는 분배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그 다음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현재의 한국사회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국사회를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견인하기 위해서 성도 스스로 더 나아가서 단체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토지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공의를 구하는 운동과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열심히 추구해왔던 전도와 선교 활동을 병행하면 한국기독교는 일제시대와 같이 한국사회에 영적(정신적) 그리고 물질적으로 희망을 주는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하는 결정체가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브레이크뉴스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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