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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개방문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개도국들과 전세계 NGO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칸쿤회의에서 선언문 채택에 실패함에 따라 미국과 유럽연합은 특별각료회의를 다시 열어 관세·정부보조금·개도국 지위 등의 문제를 확정지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내년 쌀 협상도 크게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오마이뉴스>는 11차례에 걸쳐 '농수산물 수입개방에 관한 11가지 오해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주1회 특별기획을 싣고 있다. 이 기사는 열번째로, 장하준 교수를 통해 '무차별 자유무역'을 내세우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농업개방협상에 임하는 한국정부의 문제점을 짚어보았다....편집자 주


명제 10. 0:5로 지는 게임, 0:4로 지면 선방이다

한국의 통상관료들은 "수입개방은 막을 수 없는 대세"라며 "0:5로 지는 게임을 0:4로 지게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약소국의 처지를 토로한다. 과연 그런가.

▲ 장하준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국제회의에 다니다보면 우리나라에 대한 평이 안 좋다. 특히 WTO관련 협상에서 욕을 많이 먹는다. 공산품 협상에선 선진국 편에 서서 관세인하 하라고 후진국 협박하고, 농업협상에선 개도국 주장을 하니 씨가 먹히겠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이런 '박쥐외교'가 국제적인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안적 세계화' '상식적 세계화'의 모델을 찾고 있는 장하준(영국 캠브리지대 경제학) 교수 . 지난 17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장 교수는 한국의 일관성 없는 개방협상을 '박쥐외교'라 단정했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선진국이었다가 불리할 때는 후진국이었다가 하는 행동이,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새가 되었다가 짐승이 되었다가 하는 이솝우화의 박쥐같다는 얘기다.

장 교수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 WTO 대응전략을 제공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선진국 일방의 이해관계로 돌아가는 WTO관련 협상에서 장 교수가 내세우는 비판의 핵심은 '사다리 차버리기(Kicking Away The Ladder)'. 그가 펴낸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이 책으로 그는 지난 11월 한국인 최초로 제도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미르달상'을 받기도 했다.

"'사다리 차버리기'란 자기는 먼저 올라가 놓고 뒤에 오는 사람을 못 오게 하는 걸 말한다. 19세기 전후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선진국들은 보호무역을 펴면서 경제자립을 위해 정부보조금과 지적재산권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렇게 해서 꼭대기에 올라간 선진국들이 지금은 후진국들이 '경제발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올까봐 무차별적인 자유무역을 내세우고 있다."

장 교수에 따르면,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실상 '보호무역의 원조'였다. 18세기 말 영국의 자유무역 주장에 맞서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튼(미화 10달러 화폐에 그려진 인물)은 유치산업보호론을 세계 최초로 체계화했고, 1830년대부터 2차 대전 때까지 평균 40~50%라는 세계 최초의 공산품 관세율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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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는 누구?

▲ 미르달상을 받은 장 교수의 저서 <사다리 차버리기>
27살 때 캠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하고, 최연소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후보로 물망에 오른바 있는 장하준 교수(42)는 '한국경제의 IMF 이후'를 연구하기 위해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다.

그는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제 3세계 중심의 국제포럼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함께 가는 세계화'라는 모토를 걸고 있는 이 국제포럼(Globalization and Development Forum/가칭)에서 장 교수는 인도 델리대학의 나야 총장과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미국 포드 재단이 후원하고 있는 이 포럼은 기존의 선진국 비즈니스맨들 '끼리끼리'의 포럼에서 벗어나 노동계·비정부기구·정부·노동계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세계화'에 대해 얘기해 보자는 것. 한마디로 힘센 나라가 일방적으로 몰아부치는 세계화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다.

장재식 현 민주당 의원이 부친인 장하준 교수는 여성개발원 장하진 원장과 참여연대의 장하성 교수와 사촌지간이기도 하다. 특히 대안연대회의 소속의 장 교수는 사촌형인 장하성(고려대 경영학) 교수가 주도한 바 있는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비판과 재벌개혁을 두고서도 견해차를 보여 주변의 관심을 끌었다.
장 교수가 지적하는 WTO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차별' 원칙 아래 처지가 다른 나라들에게 일률적인 규칙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공정한 것 같지만, 권투경기를 예로 들자면 헤비급 선수와 프라이급 선수를 맞대결시키는 것과 같다. WTO의 기준중에는 후진국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게 많다. 후진국들이 관세, 보조금, 지적재산권의 일부 위반, 그리고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 없이는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도 같은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루지 않았나."

우리나라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국제시장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공산품은 시장개방 해도 문제가 없지만 그것의 대가로 내줘야 하는 농업은 국제경쟁력이 취약해서 보호와 보조의 대상이라는 것. 여기에 장 교수가 제시하는 대안은 '대승적 민족주의'이다.

"크게 보자는 거다. 개도국 주장만 할 게 아니라 WTO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문제, 즉 WTO는 후진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도 적응하기 힘들만큼 획일적인 '글로벌 스탠다드'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한국의 농민과 같은 특정한 소수집단이 일방적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의 부담을 지게되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가지 점을 지적하면서 WTO협상에 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가 농업에서만큼은 후진국이므로 개방을 늦출 수 있게 해달라는 구차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손쉬운' 전략일 수는 있어도 '비전은 없다'는 얘기다. 마치 '개방은 맞지만 우리는 안 할래 식'과 같다.

자유무역 수호자 자처하는 미국, 실상은 보호무역의 원조

이달 초 허상만 농림부 장관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수파차이 WTO 사무총장과 카스티요 일반이사회 의장을 면담하고, 한국의 열악한 농정 현실을 내세워 개도국 지위 유지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내년 초에 재개될 WTO협상을 앞두고 통상외교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장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농업의 개도국 주장은 편협한 민족주의다. 공산품에 있어서는 선진국의 자유무역 논리를 그대로 내세우면서 어떻게 농업에 있어서는 개도국 주장을 하냐는 얘기다.

"우리나라 통상정책을 이끌어가는 분들의 기본적인 전략은 시장개방인데 농민들의 저항이 심하니까 가장 손쉬운 탈출구로 개도국 유지라는 전략을 취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당장에는 이익을 줄지 몰라도 이와 같은 단순논리로는 시장개방협상에 지혜롭게 대응할 수 없다."

가령 지난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 때 '협상력 부재'라는 비판이 나오자, 농림부는 "우리는 0:5로 질 게임을 0:4로 지게 하려고 노력한다"며 국제협상에 임한 약소국의 처지를 토로한 바 있다.

"개방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그런 거다. WTO 자체에 대한 부당성을 왜 문제제기 못하나. WTO는 그야말로 체급이 다른 선수끼리 싸움을 붙여 놓은 불공정한 게임이다.

선진국들은 2015년까지 공산품 관세를 다 내리자면서 후진국은 상대적으로 관세가 높으니까 더 많이 깎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4만불 국민소득의 스위스와 100불 수준의 이디오피아에게 같은 관세를 적용할 수 있겠나."

▲ 장하준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국도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장 교수는 비판했다. 개방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공산품에 대한 선진국의 주장과 같은 행보를 한다는 것. 여기에 장 교수는 '국제 구타'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군대에서 구타를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비록 선배에게 맞았더라도 후배를 때리지 않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개방이 대세라는 주장은 공산품 부분에 한하는 논리. 그렇게 되면 농업은 '맞아야 할 처지'가 당연시되는 것이고 한 대라도 덜 맞겠다는 수세적 전략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장 교수는 "보호장구를 갖추게 해달라던가 파트너를 바꿔달라는 등의 적극적 요구로 WTO 협상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 교수는 농민계에도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개방 반대'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선진국의 위선을 찌르고 우리도 동시에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안 한다고만 하다가는 언제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밀린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자기 논리가 있을 때에만 지속적으로 힘을 축적해 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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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같은 짓 해서는 한국농업의 개도국 주장 설득력 없어"

장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얼핏 이상론으로 들릴지 몰라도 현실에서 통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칸쿤회의 결렬에서 최대 변수로 작용했던 G21(개도국연합)의 역할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후진국의 입장을 대변해온 인도와 WTO에 가입한 중국, 그리고 룰라 대통령 당선 이후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걷고있는 브라질이 중심이 돼 바로 선진국들의 '사다리 차버리기' 논리를 예리하게 공격했다.

"칸쿤회의가 결렬된 것은 반세계화 시위라기 보다 개도국들의 선전 때문이었다. 중국, 인도, 브라질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후진국들의 세력을 결집시켰다. 이전에 각개격파로 협상막판에 무너졌던 후진국들이 단결하여 버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원조를 바라는 아프리카마저도 WTO에 반대할 정도로 WTO가 보편적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마당에 주효했던 전략이었다."

장 교수는 WTO는 신뢰를 잃은 체제라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WTO가 내세우는 자유무역의 폭력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로 '에이즈 치료제'에 가한 선진국들의 지적재산권 요구를 들었다.

2001년 제4차 WTO 도하 각료회의를 앞두고 에이즈 치료약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영국·미국·스위스의 제약회사들은 인도·브라질·태국 등에 있는 제약회사들이 자신들의 약을 불법 복제하여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것을 지적재산권 위배라고 주장했다.

"선진국이 생산한 약을 사먹으려면 1만불이 든다. 생산비가 비싸서가 아니라 독점권을 가진 제약회사들이 높은 이윤을 붙이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약을 인도·태국 등의 특허권이 없는 나라들의 회사에서 사면 300불이면 된다. 이런 상황에 에이즈 환자가 많은 아프리카·아시아의 나라들에게 선진국의 특허권 주장은 곧 '죽으라는' 소리다."

▲ 장하준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후진국들의 '각성'은 WTO의 '위기'를 점점 더 심화시키고 있다. 장 교수는 "자유무역이 선진국들의 감언이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시애틀 회의를 시작으로 칸쿤 회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1995년 WTO가 처음 출발했을 때 후진국들은 그 실상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선진국들은 WTO회의에 대표자들을 100~200명씩 보내는데 후진국은 2~3명이 고작이다. 그 인원으론 하루에 열댓개씩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도 힘들다. 또 분석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후진국들은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선진국들이 약속한 섬유와 농업의 시장개방이 이행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뒤로는 자국 농산물에 보조금 주고 수입농산물은 덤핑으로 가격을 후려쳤다."

결정적으로 후진국들에게 분노를 산 것은 1999년 시애틀 회의에서였다. 회의장에서 소위 선진국들이 '그린 룸'으로 알려진 밀실에서 자기들끼리 협상하고 자신들에 반대하는 후진국 대표를 불러 협박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협상을 진행했다. 일부 후진국 대표들은 그린룸에 들어가려다 경비원의 물리적 제지까지 받았을 정도로 약소국의 치욕은 극에 달했다.

장 교수는 이같은 WTO협상의 실체를 들어 "공산품과 농산물의 주고받기 식이라는 자유무역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WTO는 형식적으론 1국 1표를 행사하는 구조를 띠고 있지만, (그렇다면 후진국이 이겨야 하지만) 실상은 합의에 의한 것이다. 뒤뜰로 가서 협박하면서 하나씩 무너뜨리는 전략이다."

내년 2월 WTO협상이 재개될 예정이다. 과연 어디와 연대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을 보장하는가. 장하준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년 2월 WTO재개... 한국농업 개도국 관철 어려움 봉착
15~16일 스위스에서 열린 WTO 일반이사회, 무슨 얘기 오갔나

현지시간으로 지난 15~16일 이틀동안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가 열렸다. 농업·면화·비농산물·싱가포르 이슈(외국인 투자확대, 국내기업 우대철폐, 정부 구매행위 규제, 무역절차 간소화) 등 4개 이슈에 대한 비공식 협의가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칸쿤회의 때 의장수정안을 협상의 출발점으로 하는데 원칙적으로 찬성했으나 수정안 중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따르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내년에 협상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각국의 입장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농림부 한 고위관계자는 "다자간 협상과 일괄타결의 어려움이 이번 회의에서도 확인되었다"며 "양자간 협상에 대한 미국측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어 "2005년까지 WTO협상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은 최소 1년 이상 미뤄지지 않겠냐"고 예상했다.

이번 WTO 일반이사회가 열리기 전 허상만 농림부 장관은 WTO 사무총장을 접촉하는 등 한국농업의 개도국 주장을 설득했지만 한국의 이같은 협상전략은 더욱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제네바 일반이사회의에서 '개도국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개도국 주장은 '자기선언'을 통해 관철되었으나 앞으로는 '객관적 지표'를 마련해 개도국 인정을 하겠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한국이 OECD 가입국이란 점을 들어 한국의 개도국 주장은 맞지 않다고 반대해온 미국와 유럽연합의 논리를 넘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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