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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 한국인 피폭자 곽복순 할머니가 17살 때 일본 히로시마에서 겪었던 원폭피해의 참상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살아남은 것 자체가 저에겐 큰 책임을 준 겁니다. 얼마 살지 못하는 제가 더이상 바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겪은 참혹한 일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60년전 '그날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은 숨쉬는 사람들마저 귀신으로 착각할 만큼 혼돈의 날이었다. 곽복순(77) 할머니는 오늘도 그날을 되새기며 눈물을 훔친다. 지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곽 할머니는 20세기 핵(核)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일본 히로시마에 서 있었다.

핵시대의 서막을 알린 그곳에서

원자폭탄(원폭)의 위력은 일본 제국주의의 항복을 앞당기에 충분했지만, 원폭피해자 곽 할머니의 생애는 더욱 굴곡으로 접어들게 됐다.

조선인(재일 한국인) 원폭피해자 곽 할머니는 지난달 25일 오후 3시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의 한 강의실에서 자신의 피폭 경험을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을 했다. 하루 전날인 24일부터 4박5일 동안 평화기행을 위해 히로시마를 찾은 대구 KYC 회원들은 할머니의 증언을 경청했다.

고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한 곽 할머니는 "한국 말을 잘 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곽 할머니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을 이어나갔다.

경북 성주 출신으로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곽 할머니가 곽 할머니가 피폭을 당한 시기는 '꽃다운 나이' 열일곱살 때. 일본에서 어머니를 잃은 곽 할머니는 원폭이 투하되던 시기 가족의 곁을 떠나 히로시마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있었고, 동생을 맡은 그에겐 먹고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곽 할머니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꾼 사건은 그 뒤에 터졌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미공군 B-29 폭격기 '에노라 게이'는 한 발의 원폭(Little Boy: 꼬마·홀쭉이)으로 히로시마의 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폭발한 원폭은 붉은 섬광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섭씨 30만도의 고열을 뿜어내고 폭풍을 일으켰다. 히로시마의 하늘과 땅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당시 17살의 곽 할머니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함께 배급을 받으러 가기위해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기위해 이웃집 아주머니를 기다리게 한 사이 원폭이 터졌다. 단순 폭격으로 생각한 곽 할머니는 순식간의 폭음에 귀와 눈을 막고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은 여느 폭격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할머니의 증언은 이렇게 이어졌다.

원폭이 떨어진 후... 그곳은 '지옥'이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폭탄이 떨어지고 나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몸에서 피가 나길래 '도와달라'고 막 소리를 쳤어요. 하지만 정적만이 돌고 너무나 고요했어요.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도 안나요. 정신없이 기어나왔답니다."

땅바닥이 유난히 뜨거웠기 때문에 할머니는 나무합판을 발바닥에 대고 원피스 천조각을 뜯어 묶었다. 그러나 집밖으로 나온 그 순간의 광경은 지옥과도 같았다.

"바깥으로 나왔는데 속옷 하나만 걸친 남자가 피범벅이 돼 있었어요. 말도 하지 못하고 땅바닥을 기고 있었지요. 또 저만치에서는 모녀로 보이는 여자들이 간절하게 '도와달라'는 얼굴을 했지만 내 몸도 거두기 힘들어 그냥 지나쳤어요."

"방공호로 들어갔는데 한 할머니가 저만치 앉아있었어요. 한 남자가 할머니를 흔들어 깨워봤지만 벌써 죽어 있었어요. 그후의 기억은 더욱 처참했었죠. 하얗고 빨간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손수레로 운반되는 광경을 수도 없이 봤어요.

사람은 살아있는데 피부는 거의 없어요. 상처가 오래된 사람들은 누런 구더기가 입주변으로 꼼지락거리고 고름이 철철 넘쳤죠. 젓가락을 집어서 3센티미터나 되는 구더기를 빼내 발로 밟아 죽이던 때 그 소리…."


곽 할머니가 겪은 원폭의 고통은 처참한 광경만이 아니었다. 그속에서 느꼈던 인간의 허약함과 증오의 감정은 쉽게 떨칠 수 없는 정신적 아픔으로 남아있다.

"원폭이 떨어진 후 쓰러진 내 몸에서 피가 흘렀어요. 하지만 배급을 함께 받으러 갔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멀쩡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왜 나만 이렇게 다치고 그 아주머니는 멀쩡한가라는 생각에 속으로 그 아주머니를 미워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저보다 심한 상처를 입었더군요. 그후로 그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죄를 지은 것 같았죠."

60년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 공포 "산 사람도 귀신같아"

그후 곽 할머니는 해방을 맞았지만 일본에 거주하면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잿더미 속에서 할머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원폭을 입은 몸도 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계나 건강보다 더 힘든 것은 원폭을 입었을 당시 겪어야 했던 공포가 60년이 지난 오늘도 채 가시지 않는다는 것.

곽 할머니는 "원폭이 떨어진 후 겪었던 지옥같은 그 때 당시 상황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면서 "나쁜 꿈을 꾸거나 눈을 뜨고 있었도 사람들이 마치 귀신처럼 보이는 것 같다"며 눈물을 훔쳤다.

곽 할머니는 여느 원폭피해자들처럼 당시 피폭의 경험을 떠올리지 않으려 많은 세월 숨죽이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원폭의 위력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그에게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곽 할머니가 20여년전 미국을 방문할 당시 경험이었다. 곽 할머니는 당시 미국 국무성 한 관계자를 만났다. 그 관계자는 "원폭이 떨어졌기 때문에 더 희생돼야 할 군인들도 목숨을 구한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돋은 할머니는 울음만 흘렸다고 한다.

"이지메로 자살한 일본의 여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죠. 왜 저 아이는 말도 못하고 죽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겪었던 그 참화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곽 할머니는 숱한 강연을 다니며 원폭 당시의 체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도 다짐했다.

조선인 원폭피해자에게 원폭은 과연 '해방'이었나

당시 히로미사와 나가사키에서 희생된 한국인(조선인) 피폭자들은 대략 7만여명(폭사자 4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45년 원폭투하가 아직도 일본의 패망과 일본 제국주의의 '응보'라는 논리가 만연한 속에서 곽 할머니의 증언은 핵무기의 위력이 얼마나 죄없는 이들에게도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지 증언해야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원폭투하=해방'이라는 시각 속에서 조선인 원폭피해자 곽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해방'은 정말 이뤄진 것인가. 조선인 피폭자 곽복순은 오늘도 핵무기의 참화가 되풀이 되지않기 위해 평화의 소중함을 증언하고 있다.

원폭피해자 위한 국제서명운동 벌인다
대구KYC, 히로시마 평화기행단 활동 결산

▲ 대구KYC 평화기행단 일행 등이 히로시마 평화공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원사업을 벌여오고 있는 대구KYC(공동대표 이상욱·이홍우)는 지난달 24일부터 28일까지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평화기행단' 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평화기행단은 초등학생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대구KYC 회원 등 30여명이 참가했다. 평화기행단은 재일 한국인 원폭피해자인 곽복순(77)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재일본조선인피폭자협의회 리실근(75) 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리실근 회장은 지난달 26일 오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를 입은 사실만 강조한 채 원폭을 입은 원인에 대해서는 방기하고 있다"면서 "원폭투하에 대한 본질을 명확히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리실근 회장은 또한 "일본 정부가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해야한다"면서 "특히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배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리실근 회장은 특히 "원폭피해를 입은 한국과 북조선(북한)이 공동의 목소리를 일본 정부에 내야한다"고 강조했다.

강연 이외에도 평화기행단은 히로시마 평화공원내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위령비 앞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에 이어 원폭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영혼을 달랬다. 대구KYC는 지난 26일 히로시마시청에서 북한 원폭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도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오마이뉴스 1월 27일자 기사참조)

김동렬 대구KYC 사무처장은 "이번 평화기행단 행사는 대구KYC에서 꾸준하게 진행해온 구술증언 사업에서 원폭 투하지를 방문하는 현장답사를 통해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면서 "특히 일제강점기 피해자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 방치되고있는 북한의 원폭피해자들에게도 관심을 호소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한편 대구KYC는 최근까지 진행해온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구술증언 사업인 길라잡이 행사를 계속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특히 올해 원폭투하 60주년을 맞아 대구KYC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비롯해 북한 등 일본 국외에 거주하는 피폭자의 원호법 적용과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제 서명운동을 벌여나갈 방침이다.

덧붙이는 글 | *원폭피해자 지원 및 구술증언 사업 <평화길라잡이> 참여하기→대구KYC

*<대구경북 오마이뉴스> 바로가기→dg.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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