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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원폭피해 2세들은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원폭피폭 2세가 되었다. 늘 건강에 대한 불안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으로 태어난 우리는 이제 우리들의 주어진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누구하나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대변해주지 않는다."(원폭피해 2세 김형율 씨가 쓴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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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22일 보도] 원폭피해 2세, 처음 '실명' 공개

▲ 지난 3월 22일 대구 한 시민단체에서 피폭 2세 김형률 씨가 기자회견을 가지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지난 45년 두 발의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후 수만명의 원폭피해자들이 양산됐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들의 고통은 대물림되고 있다. 원폭피해 1세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그 자식들인 피폭자 2세들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내 원폭 피폭자 2세(이하 피폭자 2세)들이 '한국피폭자2세회'(이하 2세회. 회장 이승덕)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4시 대구 시내 한 음식점에서는 한국인 원폭피해 2세 10여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는 일본인 피폭자 2세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지금까지 국내 피폭자 2세들의 '모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89년부터 '일본피폭자2세회'(회장 히라노 노비치)가 주축이 돼 한국인 피폭2세들과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교류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서울, 부산 등 각 지역별로 한·일 양국의 피폭2세들간의 교류가 있었던 것. 하지만 이 당시까지 2세회는 단순 친목회 형식이었고 전국적인 조직 및 체계화가 부족해 활동이 미비했다. 게다가 91년부터 98년까지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가 하면, 10여명 남짓한 회원들이 참석해 한계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14일 한국인 피폭자 2세들의 모임은 지금까지 느슨하게 운영되던 2세회를 새롭게 정비하고, 보다 많은 피폭자 2세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기구 결성을 위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발걸음에는 한계도 많이 나타난다.

파악된 국내 피폭자2세는 40여 명 선에 그쳐

[인터뷰] 한국피폭자2세회 회장 이승덕(40)씨

▲ 이승덕 회장
- 처음 자신이 피폭2세로서 활동을 해야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아버지가 히로시마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이 당시 원폭피해를 입었는데 재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피폭자2세회 히라노 씨를 만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

- 현재 국내의 피폭2세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구체적인 자료가 나온 것은 아니다. 국내에 생존하고 있는 피폭1세들이 대략 2천명이라고 본다면 8000명 선에 이르지 않겠나. 하지만 원폭피해자협회 등을 통해 구체적인 신상이 파악된 인원은 40여명이 전부이다."

-이번 모임은 어떤 의미가 있나.
"국내에서도 피폭자 2세 모임의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지역별로 다른 피폭 2세들을 파악하고 전체 총회를 개최하는 것도 논의를 해야했다. 하지만 직접 봤듯이 아직도 참여 인원이 10여명 선에 그치고 있다."

- 현재 피폭자 2세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인가.
"현재 미국과 일본 등 연구기간에서 방사선으로 인한 영향이 유전되는가에 대한 여부를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결국 1세대들의 피폭이 2세에게 영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일본정부에 대해 이 연구결과에 따라서 대응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일본의 피폭2세들의 모임과 비교해 본다면 국내의 상황은 어떤가. 그리고 일본인 피폭자 2세들의 상황은.
"일본에 비한다면 우리 피폭2세들의 모임은 걸음마 수준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피폭2세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정부도 그들을 원폭피해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 일부 한국인 피폭자 2세들이 일본에 건너가 검진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나도 건강검진을 받긴 했다. 하지만 요식적인 것뿐이다. 일본정부는 몇 명의 한국인 피폭자 2세들을 검진을 하고 언론에 인도적인 양 떠들 뿐이었다. 진짜 검진을 위해서는 정밀검진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 이승욱
이날 모임의 경우 서울, 평택, 부산, 진주, 대구 등 각 지역의 피폭2세들이 참여하긴 했지만 그 수는 12명이 전부. 이러한 저조한 참여율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피폭2세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2세회에서 구체적인 신상이 파악되고 있는 피폭자 2세는 40여명 정도 선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피폭 1세대들이 대략 2000여명 규모라고 본다면 피폭자 2세는 단순 계산으로만 5000~8000명 선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날 모임에 참석한 한 피폭자 2세는 "아직도 결혼이나 직장 문제로 불이익을 당할까 고민하고 있는 피폭자 2세들이 많이 있다"면서 "특히 피폭자 2세들의 신상을 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피폭 1세들이 협조를 해야 하는데 자식들이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주저하고 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조직을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재원마련도 어려운 상태이다. 국내에서 지난 2000년 8월 서울에서 피폭자 2세 문제와 관련한 한·일 양측이 공동으로 심포지움을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행사는 일본측 피폭자 2세들의 '지원'으로 겨우 가능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거기다 피폭 1세들의 단체인 '원폭피해자협회' 역시 조성된 기금이 앞으로 2년 안에 바닥이 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마당이라 피폭자 2세에 대한 지원까지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이날 모임을 가진 피폭2세들은 지금부터라도 자신들을 '지켜줄'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한 참석자는 "이번처럼 각지의 피폭 2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피폭2세들의 전국적인 공동기구를 만들자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늦은 감은 있지만 차근차근 우리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지금까지 회장으로 맡고 있던 이승덕 회장을 유임하고, 전국에 산재한 피폭자 2세들의 신상파악에 대한 방법 등을 논의했다. 또한 오는 11월 서울에서 2차 모임을 갖기로 합의했다.

한편, 지난 3월 언론을 통해 원폭피해 2세의 고통을 호소했던 김형율(32. 부산거주)씨도 이날 자리에 참석했다. 김씨는 당시 언론과 기자회견을 가진 후 일본을 직접 찾는 등 피폭자 2세 문제의 공론화를 위해 힘써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김씨는 더욱 쇠약한 모습을 보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김씨는 "최근 병원 진료 결과 폐 기능이 20%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는 소견을 들었다"면서 "앞으로 얼마나 이런 몸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고 하소연하며 피폭자 2세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호소했다.

[취재수첩] 원폭 피폭자 2세들의 우려

원폭 피폭자 2세들을 취재하는 도중 그들로부터 들은 가장 우려의 말 중 하나는 언론을 통해 사회적인 공론화가 이뤄질 때, 혹여 원폭 피폭자 2세들의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 3월 언론에 자신의 피해사례를 공개한 김형률씨 역시 이 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김씨는 "당시 언론에 나의 이야기가 나가면서 일부 주위 분들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고, 나도 고민을 많이 하게됐다"면서 "유전문제를 거론하면 결혼이나 취업 등에 있어 사회적인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원폭피폭 2세들에 대한 배척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털어놨다.

결국 자신의 신체적인 고통이 언론에 조명되면서 다른 '정상적인' 피폭2세들에 대한 선입견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김씨의 말처럼 현재까지 공개적인 석상에 자리하는 피폭자 2세들은 대부분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씨의 경우와 같이 원인을 모를 질병들로 시름하는 피폭자 2세들의 고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전염병과 유전적 질환에 대한 '편견'과 '기피'가 존재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는 대목이었다. /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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