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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박물관지 2001, 심사정 유마도 중 일부
조선후기 심사정이 그린 유마도 그림이다. 보통 말들은 모래 목욕을 좋아하는데, 몸에 땀이 흐르거나 목욕을 한 후 모래판에서 온몸을 뒹굴며 몸에 붙은 기생충이나 이물질을 털어 낸다. 모래 목욕하는 말을 처음 본 사람은 ‘말이 실성하지 않았나’ 할 정도로 심하게 발버둥 친다. 말 주인이 들고 있는 것은 채찍으로 팽이채와 비슷한 형태의 채를 사용한다.

심사정은 조선 후기 선비 화가로 본관은 청송이며 호는 현재(玄齋)다. 명문 사대부집안 출신이었지만 조부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그림에만 전념하였다. 산수화, 화조화, 신선화, 인물화 등 여러 종류의 그림을 두루 잘 그렸다. 겸재 정선(鄭敾)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하지만 정선의 진경 풍과는 다른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의 그림은 중국의 남화(南畵)와 북화(北畵)를 자습하여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여, 중국풍의 그림보다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와 묵법으로 자신의 개성 있는 회화 세계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심사정은 대담한 필선과 고아한 담채를 혼합한 우수한 기법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 한국의 미 19, 1985 중앙일보, 풍속화 중 일부
단원 김홍도의 편자박기 그림이다. 말에게 있어서 편자는 말의 발굽을 보호하는 일종의 신발과 같은 역할을 한다. 'U'형의 편자를 작은 못을 이용하여 말의 발바닥에 망치로 고정시킨다. 그림 하단에 보이는 작두처럼 보이는 것은 발 발굽을 편자가 박히기 좋게 깎기 위한 칼이다. 만약 말의 편자가 떨어질 경우 그 말은 마치 뜨거운 모래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서 기승자의 균형이 깨진다. 이로 인해 낙마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김홍도는 궁중에서 그림을 담당하던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71년에 왕세손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조선시대 군사무예의 정수를 담은 무예24기가 실린 무예도보통지의 그림 또한 그와 함께 도화서에서 일한 허감을 비롯한 네 명의 궁중화원들이 그렸다. 1788년 스승인 김응환(金應煥)이 정조의 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대마도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억울하게 뒤주 속에 갇혀 승하한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기 위해 지어진 수원 용주사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를 그렸고, 1795년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 정조의 명으로 사찰에서는 드물게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그림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국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 마사박물관도록, 2001, 유하신마도 일부, 안중식
두터운 버드나무와 화사하게 피어오른 살구꽃 그리고 그 사이를 어여쁜 말 한 마리가 달린다. 본 그림의 작가인 안중식은 조선말기 풍전등화와 같던 조선이 안정과 평안이 가득해지길 바라며 이 작품을 남겼다. 본래 버드나무와 살구꽃은 고대 중국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살구꽃이 피고 버드나무가 물오르는 시절에 과거시험이 있어 그 과거에 참가한 모든 이에게 꿈과 희망을 상징하며, 달리는 말은 평안한 시절을 상징한다.

안중식은 조선말기 개화파인 김윤식(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제도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텐진(天津)에 다녀왔으며, 이때 서구의 과학적인 소묘법을 익혔고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장승업에 이어 산수, 인물, 화조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잘 그렸다. 그래서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 제작에 발탁되기도 하는 등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다.

▲ 한국의 미 19, 1985 중앙일보, 인물화 ‘석천한유‘ 중 일부
조선시대 김희겸이 그린 석천한유(石泉閒遊) 그림 중 일부이다. 일반적으로 말 중에서 백마는 신묘한 동물로 여겨져 일반의 갈색이나 흑색의 말에 비하여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보통 말 중에서도 말의 발목 부위만 흰 것 또한 좋은 말로 평가된다. 김희겸은 자를 중익(仲益), 호를 불염자(不染子) 또는 불염제(不染齊)라고 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희성(喜誠)이라고도 하였다.

전주가 본관이며 벼슬은 사천현감을 지녔으며, 산수화보다는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한다. 강세황은 불염자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일대에 명성이 있었고, 그의 아들도 가업을 잘 이었다고 평하였다.

▲ 마사박물관도록, 2001, 준마도(駿馬圖) 중 일부
조선말기 지운영이 그린 준마도의 일부이다. 말의 터럭 하나하나까지 세심한 붓 솜씨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영롱한 말 눈빛이 매력적이다. 극사실적 표현 중 특히 말 다리의 무릎관절 안쪽에 하얗게 점처럼 그려진 것은 ‘말의 밤눈’이라 하여 야간에 말이 움직일 때 이 부분의 신경으로 걸음을 제대로 걷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은 귀 모양으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데 그림에서처럼 귀가 앞으로 쫑긋 세워지는 것은 전방주시일 때나 혹은 기승자의 명령을 잘 수행할 때 나타난다.

만약 말의 귀가 뒤로 젖혀져 있다면 그 말은 지금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로 기승자의 명령수행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화가 지운영은 조선말기와 근대 화단을 이끌었던 뛰어난 화가의 한 사람으로 호를 선봉(舌鋒) 혹은 백은(白雲)이라 하였다. 전대의 명화들을 모사하면서 기량을 늘려 산수화와 인물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나타냈다.

▲ 마사박물관도록, 2001, 백락상마도 중 일부
조선말기 강필주가 그린 백락상마도(伯樂相馬圖)이다. 일반적으로 말의 이빨을 보고 말의 나이를 알 수 있는데, 보통 6살 정도면 기승 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기병의 중요성으로 인해 말에 관해 특별한 관리가 이뤄졌다. 특히 마경초언해, 신각참보침의마경대전, 마의방 등 다양한 마의학서를 편찬하고 마의(馬醫)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등 말 관리에 신중하였다.

근대에 화기의 발달로 기병이 약화되어 전통적인 마의학까지도 그 맥이 끊긴 상황이다. 강필주는 서화협회 발기 동인으로 참여하는 등 근대화단의 대표적인 작가였으나, 전하는 작품이 희소하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백락상마도’라는 화제는 중국 춘추시대에 말의 좋고 나쁨을 감별하고 병세를 알아 치료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전설적인 마의(馬醫) 손양(백락은 그의 호)이 말을 감식하는 장면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 민화, 이영수, 예원출판사 1998 - 구운몽도 중 일부
민화는 조선 후기 일반 서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것으로 집안의 장식이나 행운을 비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실용적인 그림이다. 민화에 나타난 말 그림 중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 그림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사법은 엄지손가락에 깍지라는 작은 시위걸이를 껴서 당기는 방식이다. 서양식의 양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른 깍지 손모양이 나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TV사극에서는 엄지로 깍지를 거는 것이 아니라,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서 각궁을 당기고 있다.

작은 부분에서도 섬세하게 고증의 절차를 밟는 것이 대중매체에서도 중요한 시점이다. 조선시대에 말을 타고 활을 쏠 때에는 일반적인 각궁보다 작은 동개궁이라는 활에 화살 깃이 큰 대우전을 쏘았다. 그 이유는 말 위에서 자유롭게 활을 움직이기 위함이고, 화살 깃이 큰 이유는 사거리보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 민화, 이영수, 예원출판사 1998 - 호렵도 중 일부
조선 후기에 그려진 민화에 나타난 호렵도 중 말을 타고 조총으로 사냥하는 그림이다. 민화의 주인공들 중 사냥하는 그림에서는 상당부분 우리나라의 의복이 아닌 청나라의 복식을 한 그림이 많다. 이처럼 말 위에서 사용하는 조총은 단조총이라하여 일반 보병이 사용하는 총구가 긴 장조총(長鳥銃)보다 길이가 훨씬 짧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 또한 동개궁처럼 말위에서 민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총을 개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삼혈총(三穴銃)이라하여 기병이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 총알 세발이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 민화, 이영수, 예원출판사 1998 - 호렵도 중 일부
앞서 설명한 호렵도 중 말을 타고 맨손으로 동물을 잡는 모습이다. 이 그림 중 더 재미난 것은 말이 입으로 동물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은 아주 온순한 동물로 초식동물의 특성처럼 겁이 많다. 따라서 일반적인 말들은 사람이나 동물을 공격적으로 물거나 발로 밟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말이 종종 애교의 표현으로 사람을 가볍게 물곤 한다. 그러나 전마(戰馬)의 경우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 맞게 말을 훈련시키는데 적을 향해 돌격하면 앞발을 들어 상대를 차고, 상대를 물어서 공격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창검(槍劍)의 번쩍거림과 화포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이에 대한 훈련도 철저하게 시켰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의 마(馬)문화 이야기 연재물은 앞으로 약 4편의 기사로 찾아 뵙겠습니다. 이후 연재물은 마상무예, 재활승마, 말의 생태 등입니다.

취재에 협조해주신 마사박물관 김정희 학예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몸철학과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 http://muye.ce.r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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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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