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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드라마 〈야인시대〉. 현재 한국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흥미 이면에는, 김두한 등의 일제시대 깡패들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에 치중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 SBS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다.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지 이미 오래인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만 되면 '거리를 헤매던' 남자들이 모두 집에 들어간다고 하고, 사정이 있어 그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을 위해 식당이나 대합실 등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비전은 어김없이 이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 요즈음 장안의 사내들 사이에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은 대한민국 남자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니 가히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미 드라마 〈허준〉이나 〈왕건> 등 역사 속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불거진 문제이긴 하지만, 시청률에 민감한 드라마의 특성상 어떠한 역사 인물이나 사건 등이 '실제'와는 다르게 과장되거나 축소된 채 다루어져, 시청자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이런 문제는 〈야인시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김두한은 깡패가 아니라 협객이었다?

▲ 한국비료공업의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으로 열린 대정부 질의 두 번째 날인 1966년 9월 22일 오전, 김두한은 자신의 집 화장실(탑골공원 화장실에서 가지고 왔다고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에서 미리 준비해 온 인분을 보자기와 횟가루 등을 이용해 꽉꽉 싸매 국회 본회의장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다.
ⓒ kimdoohan.com
특히 〈야인시대〉의 주인공이 '장군의 아들'이자 국내 조폭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만큼 김두한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크다. 먼저 그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해 반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연관이 없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문제는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김두한이 '항일(抗日) 협객'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비단 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임권택 감독이 지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총 3회에 걸쳐 만들어 낸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서도, 김두한은 조선 상인들을 일본 깡패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협객'이었지 '삥'이나 뜯는 깡패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일까.

대답은 '긍정하기 힘들다'는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일제의 압제가 드리우는 상황에서 느끼는 일종의 대리만족으로서, 종로 조선 상인들이 일본 깡패들을 혼내주는 김두한 패거리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 당시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김두한 일파와 대립관계인 것처럼 비춰지는 하야시패를 순전히 일본 깡패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극 중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혼마찌(本町), 즉 지금의 충무로 일대를 주름 잡고 있던 하야시라는 인물은 이름에서 풍기는 냄새와는 달리 평안도 출신의 조선사람인 선우영빈이었고, 그의 수하에 있던 이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지 일본인은 아니었다.

나아가 하야시패의 중간 보스이자 이후 김두한과 절친한 사이로 발전한 김동회씨가 1999년 MBC의 '깡패와 건달로 본 한국 100년'에 출연해 말한 바에 따르면, '장충단 대혈투' 이후 현 한국은행 네거리에 있는 중앙우체국 앞의 자전거 영업소 관리권을 김두한이 하야시로부터 넘겨받는 조건으로 김두한패가 하야시패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두한 자신이 직접 하야시가 자신에게 용돈으로 쓰라며 매달 천 원씩 보냈다고 말하기도 했고, 1945년 광복 이후 하야시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김두한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국 돈 전부와 권총, 일본도(日本刀)를 선물로 주고 갔다고 한다. 이를 보면 두 집단은 대립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공생 관계에 있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다만 두 집단간에 차이가 있다면, 먼저 하야시패가 김두한패보다는 조금 더 일본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하나일 테고, 김두한패는 하야시패가 상인들로부터 뜯는 '삥'의 절반만을 뜯었다는 사실이 둘 사이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하야시패가 상인들로부터 뜯는 자릿세의 절반만을 뜯는 김두한을 보고 '참 인자하기도 하여라'라고 말해야 할까?

김두한, 동네 깡패에서 정치 깡패로 발을 넓히다

▲ 뉴스 메이커 김두한. 김대중 의원 다음으로 단상에 오른 한독당 소속의 김두한은, "똥이나 처먹어, 이 개새끼들아!"라고 소리치며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이 앉아 있는 국무위원석을 향해 인분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정작 김두한은 구속·기소되지만, 일반 국민들 중 일부는 이 일을 두고 '속 시원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 kimdoohan.com
아직 드라마의 제 1부에서만 잠깐 비춰진 대목이긴 하지만, 장년의 김두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가자면 긍정적인 면은 찾기가 힘들어진다. 〈야인시대〉 1회 방송을 본 사람은 김두한으로 분한 김영철이 국회 단상 앞에서 갑자기 앞에 앉은 이들에게 오물을 끼얹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야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14세 때인 1930년 외숙댁을 가출해 상경, 거지생활을 시작한 김두한은 해방 정국 들어 이미 동네 깡패에서 '백색 테러리스트'로, 나아가 정치 깡패의 원조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때 아편 밀매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한 김두한은, 초창기에는 잠시 좌익에 몸담기도 하지만, 결국 우익과 결탁해 각종 정치 테러를 자행하는, 해방 정국의 악역을 맡게 된다. 이를테면 이승만 등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이라는 단체의 감찰부장, 소위 백색 테러를 일삼는 행동대장이 되어 서북청년단과 함께 노조 지도자나 일반 노동자들에 대해 온갖 테러를 일삼게 된다.

▲ 종로구 관철동 89번지에 있었던 우미관. 김두한으로 유명세를 탄 우미관은 1천 석 규모의 신식 2층 영화관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비켜가지 못하고 소실됐다.
ⓒ kimdoohan.com
특히 1946년 들어서는 미군정도 합법성을 인정해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의 9월 총파업 현장에 뛰어들어 총과 수류탄, 죽창 등으로 파업을 깨는 데 앞장서게 된다. 마치 오늘날의 '구사대'와 같이.

또한 과거 수표교 아래서 함께 거지 생활을 했던 정진룡이 명동 일대를 장악한 이후 이들과의 다툼 과정에서 그의 일파 여럿을 비롯, 정진룡마저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일로 인해 김두한은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우익 단체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말 풀려나게 된 그는, 일개 동네 깡패보다는 좀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이 일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인 지 막무가내식 테러 행위를 여기서 그만두지 않는다.

이후 1948년 12월 19일 대통령 이승만이 국내에 있던 우익 청년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대한청년단에 들게 되고, 이어 1954년 4월에는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대한노총은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노동자들을 위한 단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노동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단체였는데, 위원장이 '노동'과는 상관이 없는 대통령 이승만이었다는 데서 이미 이 단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종로의 주먹왕, 국회에 입성하다

▲ 현재 우미관이 있던 자리에는 '펜트 하우스'와 '엔터19', '해리피아' 등의 호프집이 나란히 입주한 빌딩이 들어서 있는데, 주변 상가 사람들은 물론 호프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 자리에 우미관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이제 드라마 〈야인시대〉를 업소 마케팅에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 권기봉
한번 권력의 맛을 알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그저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깨러 다니는 '구사대'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다. 드디어 종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대법관 출신 변호사 한근조 등을 5백 표 남짓의 차이로 물리치고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두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지만 '사사오입'이라는 초유의 정치 테러를 가하는 이승만의 필요에 의해 다시 자유당에 입당한다.

우리가 〈야인시대〉 1회 방송을 통해 알게 된 국회 오물 투척 사건도 이때쯤 일어나게 된다. 1966년 9월 15일, 당시 국내 최대 재벌이던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우리 사회는 큰 파문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의 원료로 쓰이는 1403 포대, 시가 약 1800 만원 상당의 OTSA를 밀수해 시중에 유포시킨 사건이 바로 그것으로, 당시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상정·통과시키고 관계 장관들을 소환,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 등을 추궁했다.

여야는 연일 대정부 질의를 통해 정부의 재벌 밀수 비호를 비난하고, 차관으로 들여온 자금이 어떻게 밀수품 결재에 사용될 수 있었는지 등을 따지는 한편, 삼성그룹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고 관련자 전원의 즉각 구속 및 내각 총사퇴 등을 요구했다.

대정부 질의 두 번째 날인 1966년 9월 22일 오전, 김대중 의원에 이어 마지막 질의자로 단상에 오른 한독당 소속의 김두한은, "똥이나 처먹어, 이 개새끼들아!"라고 소리치며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이 앉아 있는 국무위원석을 향해 비닐 봉지에 담아 미리 준비해 온 인분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날 회의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밀수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게 되었다. 김두한은 의장(議場) 모독과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죄목으로 구속·기소되었고, 국무위원들은 총리공관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 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두고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뉘는 듯 하다. 아무리 일을 못하고 부패로 얼룩진 사람들로 구성된 국회라고 하지만 논의 과정을 존중해야 마땅했을 국회의원이 국무위원들에게 인분 등을 뒤집어씌우는 일은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과, 오히려 그 행위 자체야 올바르지 못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권력 남용과 재벌 비호에 답답해하던 일반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는 의견이 그것. 평가야 어떻든 '통 큰' 김두한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종로 깡패 생활에 이어 파란만장한 국회의원 생활을 했던 김두한.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한 후 사업을 하기도 하고 폭력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두어 차례 더 감옥을 드나든 후 1972년 11월 21일 향년 56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한다.

공인중개사의 도움으로 결국 '우미관' 자리를 확인하다

▲ 우미관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건물의 왼쪽으로 보이는 200여 미터의 좁은 골목을 주시하자. 옛 야시장이 있던 골목으로, 자리가 좁아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결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결투는 주로 낙원상가 네거리, 즉 탑골공원 맞은편 금강제화 대리점 근처에 있던 조선극장 뒤 공터나 장충단 공원, 수표교 등지에서 벌어졌다.
ⓒ 권기봉
이처럼 조용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김두한. 김두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종로 뒷골목 '우미관(優美館)'일 것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곧잘 등장하는 우미관은, 원래 '고등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12월 일본인 하야시다(林田金次郞)가 종로 관철동 89번지에 설립한 수용인원 1천 명 정도의 벽돌로 된 2층 짜리 극장이었다.

원래 이 건물이 들어서기 이전에도 '황금연예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다고 하니 극장 자리에 다시 극장이 들어선 셈이다.

우미관은 보통 변사가 활동사진을 해설해주는 단편무성영화들을 상영했고, 이후 192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소위 '소리나는 활동사진'인 발성영화를 상영했다.

1000명 규모의 극장이 항상 2천여 명을 넘게 수용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정말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당시에는 서울 다녀왔다고 하면서 우미관 구경을 하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20-1930년대를 지나며 단성사나 조선극장과의 경쟁에서 밀린 우미관은 결국 삼류 극장으로 몰락,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기에 이른다.

주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반면 우미관 점원 김두한 때문에 더 유명해진 우미관, 오늘은 그 우미관을 찾아가려 한다.

우미관을 찾아가는 일은 쉬우면서도 또 쉽지 않다. 김두한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이 비정상적으로 높고 요즈음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요 배경이 우미관이기도 하니 일단 종로에만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 보통 우미관을 찾아간다고 하면 종로 YMCA 맞은편 골목에 있는 민속주점 '화개장터'를 찾아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현재 '화개장터'는 간판을 내린 지 오래이며, 이미 말한 호프집들이 들어서 있다. 찾기 힘들 땐 주변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아 도움을 구하자.
ⓒ 권기봉
종로 YMCA 맞은편 골목 깊지 않은 곳에 있는 우미관 자리에는 현재 '펜트 하우스'와 '엔터19', '해리피아' 등의 호프집이 나란히 입주한 빌딩이 들어서 있는데, 주변 상가 사람들은 물론 호프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 자리에 우미관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 어쩌면 김두한은 참으로 측은한 인물이다.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주먹'을 가진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정치'와 '주먹'은 닮은꼴일까? 사진은 전 대통령 박정희와 포즈를 취한 김두한.
ⓒ kimdoohan.com
그도 그럴 것이 해방 때까지만 해도 일류 극장으로 이름을 드높이던 우미관이었지만 1959년 화재로 인해 화신백화점(현 국세청이 입주해 있는 종각 밀레니엄 타워 자리) 옆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만 아니라, 현 낙원상가 근처에 우미관을 계승했다고 하는 '우미극장'마저 있었기에 사람들의 혼동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땐 고민 없이 근처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아가는 것이 최선책으로, 김중연씨의 도움으로 결국 우미관이 있었던 '본래의 자리'를 확인한 기자는 어렵지 않게 우미관을 찾을 수 있었다.

만약 김두한이 만주로 갔다면….

그런데 정작 우미관 자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김두한이라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만약 김두한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독립 운동이지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 운동"이라며 "우리도 거리의 독립군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하던 '쌍칼'을 물리치고 만주로만 갔더라면, 그도 시장통에서 소위 '삥'이나 뜯는 깡패가 아니라 독립군으로서 당당히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 김좌진 장군은 만주벌판에서 일제에 무장항쟁을 함으로써 이름을 얻었고, 그의 아들 김두한은 종로 골목에서 '삥'을 뜯고 민족인사,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하며 이름을 얻었다.
ⓒ kimdoohan.com
우리가 '종로 깡패 김두한'이나 '우익 깡패 김두한'이 아닌 '독립군 김두한'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 모두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 지나간 역사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 어떤 새로운 가치가 더 부여되는 것도 아닐 터이다.

다만 주먹을 매개로 한 상명하복과 '힘'이라는 절대권력에 대한 맹종, 폼생폼사라는 헛된 망상이 판치는 〈야인시대〉를 보고 있노라면, 자칫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저런 삶도 멋있구나' 혹은 '김두한도 독립운동을 했구나' 하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줄 지도 모를까봐 불안하기만 하다.

오늘도 아버지 이름에 똥칠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텔레비전 속의 김두한은 짐짓 엄숙한 걸음으로 우미관을 나선다. 일본 깡패 혼내주러.

▲ 극장 우미관을 주무대로 활동했기에 피에 각인이 된 것일까. 김두한의 딸 김을동과 외손자 송일국은 모두 탤런트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김두한과 김을동, 그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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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우미관' 찾아가는 방법

서울 종로구 관철동 89번지 우미관 옛터.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가면 모를까 일단 가는 방법만 알고 나면 찾아가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지하철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내리든 그 사이에 위치한 탑골공원을 향해 걷도록 하자.

조선시대 때부터 각종 육의전과 시전들이 즐비했던 거리 종로. 종로는 지금도 우리 서민들 생활의 중심 거리라 불릴 만하다. 누구 말마따나 턱시도와 산소통, 징, 김밥, 족보가 모두 통(通)하고, 어린 아기에서부터 청소년, 직장인, 갈 데 없는 할아버지들,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물상과 약장수까지 온 세대가 만나는 거리가 종로다. 이런 종로의 다양성과 역동성에 몸을 맡기고 뚜벅뚜벅 걸어나가자,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일단 탑골공원에 도착했으면 금강제화 대리점과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KFC를 시야에 넣자. 모두 낙원상가 네거리를 중심으로 각각의 모퉁이에 있으니 찾는 데 어려움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금강제화 대리점 맞은편에 보이는 KFC 앞에 선 다음, 종로3가가 아니라 종각역 쪽으로 천천히 걷자. '석우동'을 지나 바로 있는 '신포우리만두'와 '맥도날드' 사이에 왼쪽으로 골목이 나타난다. 지금 이 골목으로 들어갈 것이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많이 들어가면 안 되고 15m 정도만 들어가면 된다. 맥도날드가 있는 건물 바로 다음에 있는 건물이 바로 우미관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건물이다. 지금은 1층부터 펜트 하우스와 엔터19, 빅 스카이, 해리피아라는 호프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 건물 왼쪽에 있는 2백여 미터의 골목이 드라마 〈야인시대〉에 곧잘 등장하는 야시장 골목이다. 정 찾기가 힘들거든 주변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도 한 방법인데, 낙원상가 근처에 있던 '우미극장' 터와 혼동을 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자.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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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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