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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이슬, 달이, 새날 이다. 100일 걷기에도 참여한 실상사 작은학교 1년생들이다.
ⓒ 전희식
쌀쌀맞은 서울바람을 너무 오래 쐬어서 그런지 소리 높여 외쳐대는 주장들의 기세에 짓눌려서 그런지 맥이 다 풀려, 나는 오늘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아침 7시 반에 출발하여 오늘 새벽 1시경에 왔으니 단식 5일째인 몸으로 무리가 되긴 했다.

곧장 쓰러져 자고 오전 나절에 일어나서 온·오프라인 신문이나 방송이 어떻게 보도했나 봤더니 한결같이 몇이나 모였는지 무슨 주장을 했는지 참석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하여 내 하루의 18시간을 할애했던 여의도 농민대회의 발자취를 다시 더듬어본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노무현이가 연설할 때 연단 앞에서 누가 계란을 집어던졌을 때다. 나랑 나란히 오돌오돌 떨면서 대회를 지켜보던 실상사 작은학교 1학년 3총사 중 한 녀석이 '어머어머...'하더니 "노무현이를 왜 때리는 거야!"하고 소리를 팩 질렀다. 하도 기겁을 하길래 "괜찮다 잘 수습되잖아"라고 했더니 그 녀석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게 아녀요. 조중동에서 노무현만 맞았다고 하면 어떡해요?"라는 것이 아닌가. 참 노무현이는 행복하겠다 싶었다. 정몽준이도 하나 맞아야 안심을 할 것 같길래 저 계란은 노무현이에게 던진 게 아니고 정치꾼 전체를 향한 거라고 위로를 해주어야 했던 기억이다.

농민들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규탄이 대단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정치에 대한 일종의 열광을 볼 수 있는 대목도 재미있었다.

내 뒤에 무리를 이루고 있던 의령군에서 온 농민 몇몇은 노무현이가 연설할 때는 계속 야유를 보내더니 정몽준이가 연설할 때는 '그렇지! 옳소! 잘한다!' 등등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노무현 연설 때 하도 '저 새끼 거짓말한다'고 떠들어대길래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제발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당치도 않게 정몽준 연설에 열광을 하는 걸 보고는 내가 넌지시 물어봤다.

"아저씨 정몽준이가 무신 농사꾼 아들이요. 재벌아들이지. 아마 노동자집회에 가면 자기 아버지가 노가다도 잠시 했으니 자기가 노동자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할 것 같네요. 그런데 노무현이 욕을 와 그래 마이 하요?"

내가 경상도 본토발음으로 물었더니 그는 정작 노무현은 놔두고 DJ 욕을 하는 것이었다. DJ가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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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선 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옥천 휴게소에 내려 점심을 먹었다.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 쳤다. 고속도로는 농민들이 탄 전세버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 전희식
각 마을에서 출발한 전세버스들이 군 소재지에서 다 모여서 잠시 대기하고 있을 동안 차량에는 군 의원들이 줄줄이 올라와서 인사를 하였다. 대부분 부모 같은 노인들이 우리 차에 가득한 것을 보고는 젊은 군의원은 미안했던가 보다.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이 가야 하는데 나이 잡수신 분들이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노인들은 "노인도 농사지으니께 가야지"라고 받았다.

"다 좋은데 절대 다치지 마세요. 어르신들이 다치면 오래 가요. 몸조심하세요"라고 또 인사를 하면 "에구... 어디 다쳐서 아파야 좀 쉬든지 말든지 츳츳"하면서 가을걷이 고단함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군수가 올라왔을 때다. 농민운동가 출신 군수여서 그런지 대부분 형님·아우하면서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 반말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어떤 농민회원은 군수보고 인사온 사람이 빈손으로 오면 안 되지 하면서 농을 주고받기고 하였다.

서울로 오는 동안 차 속에서는 농민회 중앙본부에서 각 차량교육용으로 배포한 비디오가 상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회 참가자 교양자료'라는 문건도 배포가 되었는데 여간 훌륭한 게 아니었다. 나이 많으신 농민들을 고려해서 글씨도 큼직큼직했고 비디오도 여의도 집회에 대한 설명과 농민투쟁의 역사를 재미있게 잘 편집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회의 주요 요구들을 실제 따라서 외치는 방법을 손동작까지 보여가며 실습하게 하는 내용이어서 노인네들이 재미있어 했다. 노래도 딱 두 가지만 가져와서 노래패 가수들이 한 소절씩 불러주기도 하였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 가슴이 뭉클한 것은 촌 노인네들 서울 와서 인파에 묻혀 조난(?)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안내되는 것이었다.

▲ 버스 안에서 상영한 11.13 농민집회 홍보 비디오를 시청했다.
ⓒ 전희식
비디오나 유인물에 다 나왔는데도 우리 마을 농민회에서는 조직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이슬이 아빠가 머리띠를 나누어주면서, 머리띠에다 전화번호를 다 적어 넣어 주면서 대열을 잃으면 곁에 누구건 젊은이에게 이 번호로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몇 번씩 당부를 하자 어떤 할머니는 '알았어. 한 번 말하면 됐지 입 아프게 몇 번을 그러냐'고 역정을 버럭 내기도 했다. 노인네 취급받는 게 못내 싫었던 게 분명했다.

대회가 한참 진행 중일 때 어디선가 "와 이 자리에서 선거해 뿌리면 권영길이 대통령이네 대통령이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권영길은 상기된 모습이 역역했다. 연설에 힘이 팍팍 실리고 붉은 머리띠를 즉석에서 매기도 하였다. 이회창이가 왔어도 권영길의 지지세를 따라잡기에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성능 좋은 앰프가 대회장을 뜨겁게 달구는 속에서 나는 문득 앞전에 만났던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팀의 아무개 간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들은 하루전날 모여서 여의도로 행진해왔다. 다들 대회장 언저리에 모여 있길래 가운데로 가자고 했더니 그가 한 말이었다.

"이런 집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지요. 굳이 그럴 필요 뭐 있어요"라고 말했다.

▲ 노인들께는 머리띠를 나누어 주면서 일일이 휴대폰 전화번호를 써 넣어 주었다.
ⓒ 전희식
사실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한 점도 바뀐 게 없었다. 격정적으로 정치연설을 하는 연사들은 하나같이 농민들은 하늘이고, 주인이고, 민족혼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역설했다. 대부분의 주장은 천편일률적이었다. 하늘이고 주인인 농민들은 맨바닥에 앉아 계속 소주를 마시면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어느 연사의 말을 빌리면 '상가 집 개만도 못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농민'들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따라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자기 프로그램도 없었다. 모든 잘못은 정부의 농업정책 실패와 정치인의 타락에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규탄하고 요구하고 싸우는 일뿐인 것처럼 보였다. 농민이 비로소 하늘일 수 있는 생명농업, 환경농업에 대해서는 간단히 어느 연사에 의해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저렇게 열변을 토하다가 정치권에 진출한 무수한 운동권출신자들은 개인적 변절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으로부터 하루를 허락받고 여기에 참석한 세 명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들의 인솔자 겸 학부모로서 이왕 왔으니 충실히 참여하자고 아이들과 다짐을 하고 대회장 정 중앙으로 대열을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땅바닥에 나뒹구는 유인물들을 하나씩 챙겨주면서 꼭 잘 읽어보라고 하였다.

유인물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종류가 다양했을 뿐 아니라 옛날 정취 어린 조악한 '찌라시'들은 단 하나도 없었고 총 천연색이 대부분이었다. 고급용지도 제법 되었다. 땅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겹겹이 깔린 유인물을 보면서 저게 다 나무를 잘라내서 만들었다는 생각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유인물이 하나 있었다.

'아버님을 찾습니다'

▲ 이 전단지를 보면서 병환중인 어머니가 떠 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전희식
특징과 이름, 나이와 복장이 나와 있었다. 주소와 연락처 밑에는 연락주시는 분에게 사례금을 드리겠다며 거액의 숫자가 쓰여 있었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이 유인물을 겨드랑이에 끼고 전국을 헤매고 있을 그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 어느 날. 자식들과 다투었을까? 노구를 이끌고 새벽에 집을 나와 연락마저 두절된 사연을 알길은 없으나 가슴이 쓰려왔다. 몇 달만에 서울까지 와서 병환중인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내려 갈 것 같은 예감과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집회가 끝나가고 있는데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사회당 김영규 대표에게는 기회가 가지 않았다. 내빈소개 때는 있었던지라 소수정당이라는 이유로 거대언론매체에서도 외면되고 있는 사회당의 주장을 이런 데서나 좀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는데 참 아쉬웠다.

우리 마을에서 타고온 버스를 찾는 과정은 그 넓은 여의도를 한바퀴 도는 셈이었다. 머리띠에 적었던 전화번호가 어느 길 잃은 할머니를 구조(?)하기도 하였다. 너무 늦은 시간에 버스가 출발하였고 길은 막혔다. 실상사 작은학교 담임으로부터 오늘 꼭 학교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전화도 왔는지라 이슬이 아빠랑 궁리를 하다가 남원 산내면에서 온 농민회 차량을 수배를 하였다. 농민회 중앙본부를 통해 금방 망향휴게소를 지나고 있는 차량과 연결이 되었다.

옥천휴게소에서 세 아이들과 헤어질 때 용돈들을 좀 주었다. 오면서 가면서 버스 안에서 세 명의 여학생들은 음식들을 나르고 노인들도 부축하고 버스 차창에 구호도 적어 넣고 자잘한 심부름들도 아주 잘 해 주었었다. 깜깜한 밤거리에서 낯선 버스에 태워진 딸들과 헤어질려니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 버스가 안보일 때까지 전송했다.

우리 버스는 돌아오는 길 내내 이른바 관광버스 춤과 술잔들이 돌고 돌았다. 단식중이라고 했다가는 욕만 얻어먹을 것 같아 몸이 안 좋아 약을 먹는다고 해도 기어이 술을 먹이려는 짓궂은 사람들을 피하느라 가벼운 실랑이도 있었다. 11월 25일 2차 투쟁을 떠올리며 밤 마실 다녀오는 기분으로 작별을 나누었다. 사례와 격려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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