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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다행히 약속시간 보다 좀 일찍 도착했다. 회기동 경희대 정문 바로 앞 커피숍.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주 깨끗했다. 자동차와 행인들이 쉼 없이 오가는 곳인데도 거리는 정말 말끔했다.

김남식(82)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는 이곳 회기동 주변 청소를 30여 년 간 해오시는 분이다. 그럼 직업이? 그는 정년 퇴임한 교육자이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분이니 분명 여느 사람과 좀 다른 모습일 것 같았다. 난 눈빛 형형한 노인 분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이쿠, 여기 문을 닫았군요. 제가 그만 그 걸 모르고 여기서 만나자고 했네요."

삼일절 만세가 터져 났던 1919년 생인 김남식 할아버지는 꼿꼿하신 자세가 팔순의 어른 같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옆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예스런 분위기의 찻집에 자리를 정해 앉았다. 무딘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벽장식으로 멍석이 걸려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보리차가 김을 올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휴일 날 당직하는 친구를 찾아서 어느 시골학교 교무실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씨로 보아 북쪽이 고향인 듯했다. 왜 청소를 하시게 되었는지 냉큼 그 연유를 여쭙고 싶었지만 우선 고향얘기부터 꺼냈다.

"함경남도 이원이지요. 이원군 동면 청동리." 그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단어인 듯 힘주어 말했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별 소용도 없었을 그 주소를 그는 외우고 있는 것이다.

"철이 많이 나는 곳이지요. 참, 우리 고향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어요. 아이들하고 같이 가서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어요."

어깨에 책가방을 둘러메고 흙발로 내쳐 달리던 기억을 되살리는지 그의 눈빛이 젊어진다. 고향이란 단어는 어떤 나이의 사람이든 가장 어린 눈빛으로 잠기게 해주는 마력을 갖고 있나 보다.

"차호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영생 고등보통학교로 갔지요. 그때 함흥에 학교가 여럿 있었는데 공립학교는 떨어지고 사립학교인 이 학교로 갔어요. 들어가기가 수월치 않아서 애를 좀 먹었더랬지요."

그는 당시 자기를 도와준 학교선배가 대구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데모를 해서 함흥까지 온 사람인데, 그의 고향이 안동이라며 그 선배의 집 주소도 외우고 있었다. 그는 선배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학업을 도와주었는지, 어떤 날 어떻게 해주었는지 처음과 시작을 빠뜨림 없이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의 아귀까지 반듯하게 맞춰 접으려는 그의 성미가 엿보였다.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우리는 아직 차도 주문하지 않고 있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그는 아무 차나 괜찮다고 하면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나도 그의 이야기를 행여 놓칠세라 메뉴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대추차 두 잔을 주문했다. 그의 말을 놓치면 세월을 놓치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그 학교를 졸업하시고 나서 바로 교직에 들어가셨나요?
"아니요. 그리고 나서 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한 다음 교단에 섰지요. 북쪽에서는 장진군 창평 학교 등등 세 군데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해방이후 남쪽으로 왔습니다. 남쪽으로 와서는 경기도 군자학교, 그때는 국민 학교,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지요. 거기서 시작했지요"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학교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때는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라는 말을 일일이 달아주었다. 행여 듣는 이가 잊어버릴까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자는 운동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대표라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전 그저 보조역할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는 함께 일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가며 자신은 정말 뜻을 보탰을 뿐 한 게 없다며 한사코 자신을 낮추어 말하였다.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늘 하셨지요. 흥사단 모임에서였을 겁니다. 국민학교란 이름은 고쳐야 할 부끄러운 이름이다 하셨지요. 그 이후 거기서 만난 사람 몇몇이 우리 힘으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국회에 청원을 냈지요."

그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의 연원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일본 사람들도 그전에 우리의 보통학교라는 뜻으로 '심상소학교'라는 이름을 썼더랬지요. 그런데 군국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서 황국신민을 기르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일본 세력이 커갈 수 있다면서 1940년대에 그렇게 고쳤지요. 일본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이름입니까. 그 후 일본도 스스로 부끄러운 이름이라며 명칭을 바꿨는데 정작 우리는 오십 년이 넘도록 못 바꾸고 있었던 거지요.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 일제의 뿌리를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교육자로서의 전 생애를 '국민학교'에서 보내야했지만 후진들에게는 그런 불명예를 물려받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48년에 월남 이후 경기도 임지를 거쳐 1954년 서울 청량초등학교(옛날에는 청량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1986년 다시 그 학교로 돌아와 평교사로 정년 퇴임하였다. 평생 교단에 있는 동안 그는 자의로 교단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타의로 두 번이나 떠나야했던 적이 있다.

"교원노조(한국교원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5.16 군사정권 때 해직되었지요. 감옥살이를 하는데 얼마나 억울하든지..."

격동의 역사도 때로 한두 마디로 축약될 수밖에 없다. 남쪽에서 그렇게 한 번 해직되었고 또 한 번은 전에 북쪽에 있을 때였다. 해방 직후 노동당 가입을 거부하고 있던 중, 어느 날 동네 꼬마들이 학교 교무실에 걸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에 새총을 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상부에서는 근무태만으로 교장과 교사들을 문책하면서 그는 함께 파면을 당하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교육적 신념이나 태도에서 한치의 굽힘없이 지냈다. 그의 강직하고 '꼬장꼬장한' 삶의 태도를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겼다. 어떤 이들은 눈엣가시로 여겼다.

"3.15 부정선거 전에 교장이 교사들을 모아놓고 야당지지 학부모들을 만나 설득을 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내가 그 자리에서 말했지요. 그런 거 안 하려고 북에서 남으로 왔는데 여기서도 그러는가? 난 그렇게 못한다 그랬지요."

'이승만 박사가 금 덩어리가 되셔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빛나게 한다'는 말을 해대던 장학사나 교장들이 보기에 그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복직된 서울 금호학교에서 집게와 양동이를 들고 학교와 집 근처 청소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왜 그렇게 하셨나요?
"제 스스로 친일 죄값을 치르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년 퇴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사람이다.

"저는 민족 반역자입니다. 저는 일제시대 때 우리 한글을 말하지 말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쳤고,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러고도 이제까지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반민족 처벌이 있었다면 저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런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여러분은 자랑스런 교사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보다 더 심하게 친일 행각을 하고 사죄는커녕, 자신이 한 일이 반성해야하는 일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그런 따위의 말은 그에게는 하잘 것 없어 보였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버린 쓰레기를 내가 줍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에게 가장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은 '국어 상용패'에 대한 것이다. 41년부터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일제는 학교에서 한글사용을 금지시켰다. 학생들이 서로 감시하도록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당번에게 그 패를 나눠주고 우리말로 얘기를 주고받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면 그 패를 건네주게 하였다.

그 학생은 한글을 사용하는 또 다른 아이를 발견하면 건네주고, 마지막으로 그 패를 들고 있게 된 아이는 교사에게 불려가 엄한 추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왜 일본어인 국어로 말하지 않고 외국어인 조선말을 쓰느냐?'고.

"제가 그런 일을 한 사람입니다. 어찌 민족반역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아직도 주워야할 마음의 쓰레기가 정녕 있다고 생각하는지 난 그에게 묻고 싶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리고 저는 청소에 대해서 제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늘 청소를 제 7교시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보통 6교시로 수업을 마치잖아요. 흔히 아이들이 혼자서 청소를 하고 선생님한테 가서 청소 검사를 받고 했는데 전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사제동행이라 그러면 청소도 선생님하고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늘 함께 했지요."

그는 양복을 입으면서도 넥타이를 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50년대부터 그랬지요. 청소하는 데 걸리적거려서요. 풀어두었다가 직원종례시간에 다시 매곤 했는데 그것도 번거롭고 해서 아예 매지 않았지요."

그는 정년 일 년 전에는 아예 청소하는 선생님으로 지냈다. 온 종일 집게와 양동이를 잡는 그에게 '좋은 교사상'이라며 칭찬해 주려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면 그는 극구 사양했다.

그는 서울 와서 줄곧 회기동에 살아왔고 청소했으니 이 동네 역사를 훤하게 꿰뚫고 있다.

"그때 경희대 앞은 복개공사가 되기 전이라서 큰길의 반이 개울이었지요. 버스정류장도 아주 먼 데 있었지요. 연탄을 때던 시절이라 연탄재와 쓰레기가 개울을 늘 메우고 있어서 쓰레기 줍는 일이 아주 힘들었지요."

그는 요즘은 쓰레기종량제이지만 주운 쓰레기는 다행히 경희대학교에서 쓰레기박스를 이용하도록 해준다면서 '학교측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누가 누구에게 고마운 건지 난 잠시 헷갈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결 같이 청소를 하다보니 주위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옛날에는 넝마주이가 그를 동료로 잘못 알기도 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함께 쓰레기를 줍기도 한다. 피던 담배꽁초를 그의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으려는 얌체들도 있다. 그가 "난 불쌍한 고아 쓰레기만 줍습니다. 그 쓰레기는 임자가 있으니 임자가 알아서 처리하셔야 하는 거지요"라고 말하면 머쓱한 사람은 자기주머니로 넣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투덜대는 이들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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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과 같은 가훈으로 식솔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물처럼, 해님처럼'. 그 가훈은 선친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말이다.

"선친께서 마흔 여섯의 나이로 돌아가셨지요.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분이지요. 제게 물의 규칙 5가지를 일러주셨어요."

-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 물은 부드러워서 못 가는 곳이 없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로 되고 동그란 그릇에 담으면 동그랗게 된다. 물은 칼로도 자를 수 없는 뭉치는 힘이 있다.

거기에 자신이 덧붙인 가훈이다. '해님처럼'. 정확하게 한결 같이 시간을 지키며 산다는 뜻이다.

그가 옆구리에 끼고 나온 누런 봉투는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보낸 것이었다. 함석헌 선생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씨알교육을 배우는 모임>을 해온 지도 오래되었다. 그가 간여하고 헌신한 단체가 꽤 수를 셀 듯하다. 언제나 '진정한 교육'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지금도 그 실천을 위해 활기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쓰레기 줍는 일을 일상으로 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던 아들들도 이제는 아버지 옆에 선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철물점을 하던 동생이 만들어준 '사랑하는 집게'를 들고 그는 날마다 쓰레기를 줍는다.

"기운이 다 할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다"라는 그.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쓰레기를 주우려는 게 아닐 것이다. 그는 너무도 쉽게 버려져 있는 '우리의 양심'을 줍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는 것일 게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덧붙이는 글 | 권은정 기자는 한겨레 런던통신원을 지냈으며, 인터뷰 전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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