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캐나다에서 값싼 약을 산 후 기뻐하는 미국의 '의약난민'. 미국에서는 캐나다나 멕시코로 약을 우편 주문하는 것은 물론, 직접 국경을 넘어 약을 사오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 <캐나다 의사협회보>

미국 국경지대를 둘러싼 분쟁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이 질문에 많은 독자들이 멕시코와 캐나다의 국경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가는 밀입국자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다른 형태의 밀입국도 존재한다. 미국인이 국경을 넘어 캐나다나 멕시코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국경을 건너간 미국인들은 다른 불법 입국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은신처를 찾는다. 그러면 어느새 경비대 자동차가 소리 없이 다가와 그들의 행동을 살핀다. 잠입자들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다가 감시의 눈길을 피해 건물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 건물에는 '약국'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미국 정부에서 단속을 강화했던 시기에 두드러졌던 이러한 모습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시코>에 잘 나타나 있다.

일상화된 밀입국 구매에 정부도 속수무책

미국에서는 매년 수백만 명이 캐나다에서 약을 우편으로 주문하거나 아예 국경을 넘어 약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돌아온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불법이며, 적발되면 처벌받을 수 있다.

매출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제약회사는 정부의 강경한 대응을 요구해왔고,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2005년 11월 우편이나 월경을 통한 의약품 밀구매를 강력히 단속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식품의약국(FDA) 역시 정부의 단속을 지지하고 나섰다. 중요한 것은 약품의 가격이 아니라 안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제약회사와 정부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이미 폭넓게 확산된 밀입국 구매에는 미국인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공권력도 속수무책이었다. 비록 약을 산 후 붉은 단풍잎이 그려진 티셔츠를 하나씩 사 입고 오기는 해도, 이것은 미국인들에게 단순한 관광이 아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민의 반발에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서슬 퍼런 단속강화령은 11개월만인 2006년 10월에 '일시정지'라는 이름으로 흐지부지됐다. 이 11개월 동안 적발된 사례는 수만 건에 이른다.

미국 내에서 처방약은 웬만한 중산층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싸다. 이로 인해 국가를 넘나드는 '약 쇼핑' 단체관광객은 물론,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아예 이민을 떠나는 이들까지 있다. <시코>는 진료비와 약값 부담 때문에 미국 국적을 버리고 캐나다 남자와 결혼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처럼 약을 사거나 치료를 받기 위해 국경을 넘는 미국인들을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라 부른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자신들의 행위가 법에 저촉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국경을 넘는다. 약을 사기 위해 석 달에 한 번씩 멕시코를 찾는 한 '난민'의 말을 들어보자.

"캐나다에서 우편으로 약을 주문하면 미국보다 30% 정도 싸게 살 수 있지요. 저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텍사스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 멕시코로 가서 석 달치씩 약을 사가지고 오곤 합니다. 미국에서 파는 가격의 3분의 1이면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약을 그렇게 싸게 살 수 있다면 국경을 넘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캐나다에서 약을 사면 당신은 범죄자가 된다, King Features Syndicate 2002. 10. 21)

연금으로 생활하는 그는 한 달에 100만원이 넘는 약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합법적으로 약 복용을 중단하거나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것뿐이었다. 그는 불법을 택했다.

물론 외국에서 약을 합법적으로 구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합법적 구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달고 있다. 미국 면허를 발급받은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하고, 한 번에 석 달치 이상 구입할 수 없으며, 환자가 위급한 경우에 한해, 심각한 질병 치료제의 경우 미국에 없는 약만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약값, 왜 비싼가

▲ 마이클 무어의 <시코>의 한 장면. 미시건에 거주하던 한 미국 여성은 미국 의료비와 약값에 환멸을 느껴 국적을 포기하고 캐나다인이 된다.
ⓒ Lionsgate
2001년 1월자 <캐나다 의사협회보>는 900㎞가 넘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오는 한 미국인 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사는 나버트 부부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음에도, 매년 약값으로 2000만원 이상 쓰는 것이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같은 약을 캐나다에서 반값 이하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온타리오로 와 몇 달치씩 약을 사 간다. 11시간씩 차를 타는 것이 만만치 않지만, 몇 번의 수고를 하면 2년에 새 차 한대 값을 아낄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약값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두 나라의 물가와 화폐가치 사이에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약값을 결정짓는 주원인은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정책 차이에 있다.

미국 제약협회 대변인 제프 트레위트조차 미국의 약값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비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정부가 약값 결정에 개입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는 미국 소비자들이 바라보는 시각과도 일치한다. 미국 제약회사들의 이윤추구 행위에 맞서 공익을 지켜낼 아무런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소비자정의 시민연대(Citizens for Consumer Justice)'의 회장인 앨리사 사이먼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약값이 비싼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미국에서는 제약회사들이 아무런 규제 없이 원하는 가격을 책정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는 어떤 협상도 필요 없습니다." (<캐나다 의사협회보> 2001. 1. 23.)

사이먼이 이끄는 이 시민단체는 정부에서 금지령을 내리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무료 버스를 운행해 왔다. 미국의 비싼 약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캐나다로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체조차 이런 식의 도움을 얼마나 오랫동안 줄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책임전가의 삼각지대'에 사람들이 산다

▲ 의술의 상징인 황금뱀. 본래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집트를 탈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뱀에 물렸을 때 이 막대를 쳐다보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 의술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만큼 값비싼 것이 되었다.
ⓒ 강인규
미국제약협회 대변인 트레위트는 모든 책임을 제약회사에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캐나다 정부가 개입해서 25~40%까지 약값을 낮추는 정책을 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금액이지, 소비자가 부담하는 절대적 액수는 적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약값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정책이 아니라, 보험을 통해 약값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값은 그대로 두고 다른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미국의 민간보험사들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위한 어떤 시도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미국 정부와 제약회사, 그리고 보험사는 서로 책임만 전가할 뿐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서로 책임을 미룬다고 해서 이들 사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임전가의 삼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것은 국민들뿐이다. 캐나다와 멕시코 국경 근처에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러나 막을 수도, 허용할 수도 없는 이 회색지대가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다. 게다가 의약품 편법구입을 둘러싼 국가간 분쟁은 이제 캐나다인의 보건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이윤이 줄어드는 것에 분개한 미국의 제약회사들이 캐나다에 약 공급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의 2%밖에 되지 않는 캐나다는 미국 업체로서는 무시해도 좋은 대상이지만, 이 때문에 37%에 달하는 자국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는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미국의 제약업체들은 캐나다의 편법시장이 개발업체에 충분한 이익을 보장하도록 약속한 자유무역협정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며, 저가 정책을 계속하면 약품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자유무역이 국경을 넘어 소비자들에게 저렴한 상품을 배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싼 상품을 찾아 국경을 넘는 소비자를 막아서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공급 감소나 중단은 불법 복제약을 낳고, 이렇게 양산된 복제약은 다시 미국 시장으로 대량 유입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제약회사의 무모한 이윤 추구가 자국과 주변국 국민들의 보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목을 죄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고가 정책을 통한 이익추구가 궁극적으로는 저작권 위반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제약회사들은 위반 업체는 물론, 이를 막지 못한 정부에 제소로 대응할 것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이 꿈인 나라. 이를 위해 미국식 체제로 가자는 한국 정부. 그들은 국민소득 4만 달러의 미국 국민들이 약도 못 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아는 것일까?

태그:#의약 난민, #미국, #비싼 약값, #불법 월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