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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들이 처형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백 소령이 재소자 신분장을 보고 석방 여부를 결정하고 심 중위가 학살 현장을 지휘했다."

지난 2000년 <월간 말>(2월 호)을 통해 당시 사건 관계자들이 증언한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가해 책임자와 관련한 내용이다.

1950년 7월 군·경에 의해 제주 4·3 관련자 등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과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 등 최고 7000여명이 집단학살 후 암매장된 대전 골령골 집단희생사건 가해자의 신원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강성현 연구원은 1일까지 2일 간 이 단체 주최로 공주대학교 및 공주형무소 집단학살 암매장지 등에서 열린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의 진상과 배경'을 주제로 한 워크숍에서 "당시 대전형무소에서 총살시킬 재소자를 분류한 것으로 알려진 백 소령은 육군형무소 소속 헌병대 2대 형무소장인 백원교 소령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강 연구원이 지목한 백원교 소령은 8․15해방이후 서대문형무소 소장을 거쳐 육군형무소 소장으로 발탁돼 대전형무소 집단학살이 일어난 당시 육군형무소 소속 헌병대 2대 형무소장(1949. 7. 3~1950. 10. 30)을 맡았다.

또한 강 연구원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을 진두지휘했던 심 중위와 관련, "육군형무소장의 부관으로 있다가 1951년 1월 대위로 4대 소장이 된 심윤(沈倫)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강성현 연구원, <한국헌병사> 대전형무소 학살 관련 기록 제시

강 연구원은 이 같은 근거로 <한국헌병사>(1952년) 기록을 제시했다. <한국헌병사>에는 심 중위가 1950년 7월 5일 평택을 출발해 충남 공주에서 1박한 후, 이틀 뒤인 7일 대전형무소에 육군형무소 및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고 업무를 개시한 것으로 돼 있다.

▲ 지난달 30일 공주대학교에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주최로 열린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의 진상과 배경' 워크숍.
ⓒ 송성영
또 같은 달 14일까지 "중범자, 보도연맹 관계 적색분자들을 처벌한 후 일부 헌병대와 경찰을 잔류시킨 후 17일 대전을 출발"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이는 재소자에 대한 학살이 7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 동안 이루어졌다는 당시 대전형무소 교도관 등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또 대전형무소 재소자에 이어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이 7월 17일까지 자행됐다는 관련 증언과도 괘를 같이하고 있다.

강 연구원은 이를 토대로 당시 집단학살의 기획에서 예비검속, 학살은 군에서는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송요찬 헌병사령관과 이익흥 부사령관-백원교 육군형무소 소장-심윤 중위로, 경찰에서는 (백성욱 내무부 장관)-이순구 충남도경 경찰국장 겸 충남경찰비상경비사령관-서광순 사찰과장-변홍명(가명) 사찰주임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에 따라 수행된 것으로 판단했다.

최정기 교수 '대전형무소 탈옥미수 계기로 각 지구 중범자 소개' 기록 공개

이와 관련, 최정기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날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형무소 실태 연구'란 주제발표를 통해 "1950년 사건 당시 대전형무소에 2000명의 재소자들이 수감돼 있었고, 대전형무소 탈옥미수 사건(7월 1일)을 계기로 각 지구의 형무소에서 중범자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는 국방부 기록(<한국전쟁사>, 1970년)을 공개했다.

이날 워크숍을 지켜본 김종현 대전민간인희생자대책회의 회장은 "그동안 대전 산내학살을 자행한 사람들로 지목된 백 소령과 심 중위의 소속과 정확한 신원을 특정하고, 헌병대의 이동경로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며 "가해자에 대한 퍼즐 맞추기가 한 발 진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그:#대전형무소, #학살, #대전 산내, #골령골, #백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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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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