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우리 학교>의 한 장면
ⓒ 스튜디오 느림보
대세는 '다큐멘터리'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 '올해의 독립영화상' 수상과 함께 인디다큐페스티벌의 공식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우리학교>가 오는 29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7년 최고의 기대작, <우리학교>는 청춘 시트콤보다 더 유쾌하지만 어떤 멜로보다도 가슴을 울린다.

<우리학교>는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이 세운 '조선학교'를 일컫는다. 전쟁 전후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이 먼저 한 것은 사비를 털어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재일사회에서 조선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다. 일본에서 부당한 차별과 대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 하는 '고집스러움'이 학교 속에 담겨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조선학교는 홋카이도의 조선초중고급학교. 한반도 크기의 3/4에 달하는 홋카이도 지역에 조선학교는 단 하나, 이곳에 진학한 아이들은 초급반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

지난 21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김명준(37) 감독은 '떨린다'는 말로 운을 뗐다. 시사회의 반응이 좋으니까 '우리 아이들' 생각이 더 난다고.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니까 떨린다. 영화를 만들면서 이 아이들을 세상에 내놓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해해줄까 생각했다. 시사회 때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났다.

민족교육이 좋다는 '구호'는 어릴 때부터 들었지만, 외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더 자신감이 생길 것 아닌가. 특히 북과 달리 남쪽은 재일조선인 문제를 숨기고, 정치적으로만 이용해왔으니까. 재일조선인분들이 한국에서의 극장 개봉 소식을 듣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바람처럼 실제 조선학교 출신 아이들은 4~5번 영화를 봤고,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영화의 내용보다도 관객들의 반응이 더 인상 깊었을지도 모른다.

3년 5개월간의 촬영기간, 촬영 테이프 500여개

▲ <우리학교> 포스터
ⓒ 스튜디오 느림보
2002년 촬영을 시작, 3년 5개월간의 촬영을 끝내고 귀국할 2005년 4월 당시 김명준 감독의 손에는 500개가 넘는 촬영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이어진 1년 6개월여의 편집, 김 감독은 5년에 가까운 시간을 <우리학교>에 쏟아 부었다. 그의 열정 속에는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우리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던 고 조은령 감독이 있다.

재일조선인을 다룬 <하나>라는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조은령 감독은 촉망 받는 여성감독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일조선인 관련 다큐멘터리 <프론티어>(가제)를 제작 중이던 2004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촬영감독으로 만난 김명준 감독과 부부의 연을 맺은 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김명준 감독은 '누군가는 이 작업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홋카이도 조선학교로 들어갔다.

"조선학교를 다룬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조선학교에 대해 알리려는 사람들은 나말고도 많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조은령'이라는 감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 감독에게는 또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고, 그저 필연적으로 때가 되어 학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영화가 세상에 많이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학교'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 중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무관심보다는 낫지 않나? 지금까지는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긍정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기대한다. 역사는 좋은 쪽으로 흐를 것이라 믿고 있다."


역사는 좋은 쪽으로 흘러 갈 것이라는 감독의 말처럼, <우리학교>는 끝도 완성도 아닌 흘러가는 과정에 만난 또 하나의 출발점이다. 재일조선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공감해주길 기대한다는 김명준 감독. 주인공들을 일본 땅에 두고 온 그는 '우리'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조은령 감독 덕분에 특별대우를 받았다"

다음은 김명준 감독과의 인터뷰 내용.

▲ 김명준 감독
ⓒ 박은영
- 고 조은령 감독은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어떤 존재였나?
"당시 조은령 감독은 재일사회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덩달아 남편인 나도 혜택을 누린 거다. 이미 조 감독이 2년 동안 신뢰를 쌓고, 진심으로 교감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조 감독이 세상을 떠났을 때 동포들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주었다. 사람들이 고생 많았겠다고 하는데, 정말 하나도 고생한 것이 없다. 조 감독 덕분에 특별대우를 받은 거다, 행복한 거다."

- '북'과 '총련'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벽을 허무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
"처음 조은령 감독의 스태프로 히가시 오사카 중급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강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김일성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고, 나이 지긋한 관료들이 연설중이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남학생의 교복들…. 온통 까맣지 않나. 그 중 진한색은 사진과 인공기뿐이었는데, 정말 압도적이었다. 깜짝 놀랐다. 내 안에 있는 반북 이데올로기는 그만큼 무서웠다.

근데 촬영을 하면서 보니까 애들이 졸고 있더라.(웃음) 서로 '툭툭' 치고 깨우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고…. 영락없이 우리 아이들하고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 물음표가 생겼다. 선생님과 아이들 서로 펑펑 울면서 추억을 나누는 걸 찍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 이 아이들이 졸업해서 일본사회로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그 사이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벽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 같다."

- 처음 기획을 했던 조은령 감독 없이 영화를 완성했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조은령 감독은 나와 살아온 배경이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조선학교를 보는 순수하고 깨끗한 눈이 있었다. 곁에 없으니까, 영화를 찍을 때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촬영감독이었고 연출자가 아니니까, 자신이 없었다. 처음 기획한 사람이 내가 아니니까 자꾸만 조 감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다. 6개월을 찍고 나니 '도저히 이러면 안 되겠다' 싶더라. '조은령은 잊고 내 눈으로 봐야 된다, 내가 연출자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해보자', 그러면서 촬영이 편해졌다."

- 영화에서 북한으로 졸업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만경봉호에 올라 '명준 감독'을 외치며 'LOVE'라고 그려 보이는 장면이 있던데(김명준 감독은 국적이 달라 그 배에 오르지 못했다), 행복했겠다.
"아니다. 행복하지 않았다. 같이 출발해서 혼자 돌아오려니 앞이 깜깜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 싶지 않나. 그러나 나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으니까, 선생도 아니고 한국에서 왔고….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애들이 갑판위에서 손 흔들어 줄 때, 고마운 것보다 분하고 원통했다. '이게 뭔가, 내가 한국도 아니고 일본땅까지 와서 분단을 온몸 부서지게 느끼다니.' 만경봉호 타기 전엔 너무 친한 동생들이었는데, 배에 타는 순간 눈앞에 커다란 벽이 생겨버렸다. 무서웠다."

"재일조선인들의 삶 자체가 '감동'"

▲ <우리 학교>의 한 장면
ⓒ 스튜디오 느림보
- 오랜 기간 촬영을 한 만큼 한 장면 한 장면에 애착이 갈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편집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있다면?
"예술경연대회 장면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의 무대가 이틀간 펼쳐지는데 너무 좋다. 대회 기간 동안 주변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이들로 물결을 이룬다. 아이들은 1년 동안 준비한 것을 공연하고, 뒤돌아서서 운다. 그 애들이 눈물이 많다. 웃음도 많은 만큼.(웃음)

금상을 받은 중급부 아이들 무용은 '기숙사 이야기'였다. 엄마한테 편지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런 걸 형상화해서 창작 무용을 만들었다. 결국 아이들이 연기를 다 하고 돌아서서, 연습한 시간들이 떠오르니까 눈물 펑펑 흘리고… 부모님들도 울고… 감동적이었다. 근데 조국 방문이 10월이고 예술경연대회가 11월이니까, 극의 하이라이트가 2개가 될 순 없지 않나. 눈물을 머금고 잘라내야 했다."

- 앞으로 계획은?
"<우리학교>는 시사하는 바가 큰 영화다. 조선학교에 관해 연구하는 분들은 많다. 전교조 선생님들도 총련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지 않나. 그 수많은 물결의 한 부분으로, 영상 분야의 일이 허락된다면 해보고 싶다. 지금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구상 중인 아이템들은 있다. 1세분들의 증언 같은 것, 북도 남도 아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독자적인 문화에 대한 얘기도 해보고 싶다."

- 영화를 봤거나, 보실 분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아이들 눈빛 보면 푹 빠져드니까, 영화로만 보지 말고 직접 일본에 가서 확인해본다면 더 좋을 것 같다.(웃음) 영화가 좋다는 말씀들을 하시는데, 이 영화는 누가,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도 감동할 수밖에 없다. 재일조선인들의 삶 자체가 감동이니까. 이 영화가 잘 된다면, 그들의 삶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다.

현재 3000명 가까운 사람이 영화를 봤고, 앞으로도 볼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은 비슷한 지점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건 내가 그곳에서 살면서, 또 편집하면서 눈물 흘렸던 장면과 똑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공감하는 모습을 동포분들이 극장에 와서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뿌듯해 할까. 그런 생각이 든다.

영화제에서 어떤 분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고맙다고 하더라. 알고 보니 재일동포였다. 이 아이들이 있도록 해주신 세대에 대해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데, 주객전도가 아니냐. 얼마나 무시당하고 차별받고 살았으며 내게 고마움을 느꼈겠는가. 말이 안 된다. 영화가 그분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태그:#우리학교, #김명준, #재일조선인, #조선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