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올드스타전에서 투구하는 양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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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닌 열정을 연료로, 짧지만 강렬하게 타올랐던 70년대의 고교야구는 지금의 프로야구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화려하면서도 비장한 전설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양상문보다 화려한 흔적을 남긴 선수는 흔치 않다. 그 시절, 부산고 야구부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명문이라고 부르는 사람 또한 많지 않았다. 훗날 박동희와 염종석, 주형광, 손민한으로, 그리고 다시 백차승과 추신수로 이어지는 초고교급 투수의 산실로 불리게 되지만, 78년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부산고라는 이름은 군상산고와 맞붙었던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 9회 말에 4-1의 리드에서 역전을 허용했던 가슴쓰린 조연으로 각인되어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8년, 부산고는 문교부가 고교선수들의 혹사를 막기 위해 전국대회를 세 개 이상 출전하지 못하도록 했던 규제조치 때문에 골라서 출전했던 세 번의 전국대회, 즉 대통령배와 청룡기, 화랑기를 모두 휩쓸어버리는 파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세 번의 전국대회 결승에서 세 번의 완봉승을 기록하는 신화를 쓴 것이, 바로 안경잡이 에이스 양상문이었다. 전국대회 세 번 완봉승 한 안경잡이 에이스 선한 눈매를 가진, 안경잡이, 왼손 투수. 어느 모로 보나 당시로는 보기 드문 스타일이었다. 스피드건으로 측정한 구속을 놓고 재고 따지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그래서 전적으로 동대문 야구장에서 입을 타고 건너온 소문으로 평가되고 비교되던 당시, 강속구와 제구력과 두뇌플레이가 조화된 양상문은 '완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부산 출신의 안경잡이 에이스라는 점에서 두 해 선배였던 경남고 출신 최동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던 그는, 때로는 최동원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낳기도 했다. 이미 졸업해서 대학무대를 평정하고 있던 최동원과 마주 놓고 비교할 길은 없었지만, 양상문이 고교무대에서 쌓은 업적은 분명 최동원에 못지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빠른 공을 던졌다고는 하지만 최동원에 못지않다고까지 알려지던 강속구는 사실 열띤 환호성과 무기력한 상대타자의 헛방망이질이 만들어내는 착시였을 것이고, 동네 아저씨들이 감탄해 마지않던 '두뇌피칭' 또한 금테안경 탓에 부풀린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김용수, 장호연, 이상윤, 오영일 등 내로라하던 동갑내기 투수들이 넘볼 수 없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투수였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한대화, 한문연, 김정수 같은 동갑내기 타자들이 거의 건드려보지 못한 공을 던지는 투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신흥명문의 에이스가 걷는 길이 흔히 그랬듯, 그 역시 무리한 등판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교야구의 가장 빛나는 별 양상문은 고려대를 거쳐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뛰는 동안에도 선동열과 함께 '한국 아마야구 최고의 좌우완'을 구축했지만, 1985년 프로무대에 등장할 무렵에는 이미 주무기 목록에서 빠른 직구가 지워진 상태였다. 데뷔 첫 해, 그는 6승 3패 4세이브를 기록했다. 신인으로선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또 한명의 최동원을 기대했던 부산 팬들로서는 김빠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실업팀을 우회하며 같은 해 데뷔하고 비슷하게 부진한 첫해를 보내는 닮은꼴 경로를 밟아왔던 김용수가 세이브왕으로 우뚝 설 때 양상문은 오히려 1승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실업과는 다른 프로 무대
 1989년 돌핀스가 정규리그 3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던 당시 양상문(오른쪽 안경 낀 채 공을 잡고 있는 선수)
ⓒ 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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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4,5년이 흘렀을 뿐이지만 이미 프로무대의 타자들은 그가 상대해왔던 실업무대의 타자들과 다른 차원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부상이 엎쳤고, 구단과의 불화가 덮쳤다. 87년, 자이언츠는 프로무대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양상문을 더 이상 값 떨어지기 전에 처분해버리기로 한다. 원래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데려왔던 임호균과 양상문을 주축으로 다섯 명의 선수를 청보 핀토스로 보내고 정구선을 포함한 세 명을 데려오는 대규모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 당시 청보 핀토스는 트레이드 매물로 나온 선수들에게는 도살장과 같은 곳이었다. 가장 허약한 전력에 가장 빈약한 재정. 그래서 은퇴 전 마지막 경유지로 수많은 퇴물 슈퍼스타들이 거쳐 간 초창기의 인천팀. 그곳으로 떠밀려 간 양상문의 귀에 '열심히 하라'는 자이언츠 프론트의 격려는 차라리 일찌감치 옷을 벗는 게 어떠냐는 비웃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도 아니었고, 그 이름만으로 타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투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더구나 이미 연고지팀에서 버림받은 투수였을 뿐만 아니라, 만년꼴찌 핀토스에서, 죽어가는 사슴에게 더욱 맹렬하게 달려드는 맹수처럼 발톱을 세우는 상대팀의 강타선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에이스였다. 80년대를 통틀어,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도 인천팀의 투수들 사이에는 '무실점이면 승리고 두 점 주면 패전이다'라는 푸념이 전해 내려왔다. 그것은 그저 푸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양상문은 87년부터 91년까지 해마다 160이닝 이상을 던지며 경기당 3점 안팎의 실점만을 허용했다. (통산 자책점 3.59) 그러나 언제나 당연하게도 승리보다 훨씬 많은 패전을 뒤집어써야 했고, '탈꼴찌 성공의 주역'라는 제목이 아니고는 스포츠신문의 1면에 오를 일도 없었다. 그러나 빠른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협적인 구질이 있는 것도 아닌 양상문은 타자들에게 가장 상대하기 싫은 투수로 꼽히곤 했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으며,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머리의 빈 구석으로 공을 찔러 넣던 투수였던 셈이다.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양박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는 최초의 석사출신 프로야구선수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한 가지 그가 가진 '두뇌피칭'이라는 별명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만큼 그는 학구적이었고, 꼼꼼했으며, 그런 노력을 통해 약해진 어깨의 약점을 메워나갔다. 인천야구의 대들보가 되어준 부산의 거목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의 양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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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무기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끈질긴 근성이었다. 해마다 팀타율 꼴찌의 물방망이를 등에 업은 채 이름만 들어도 투수들의 어깨가 경직된다던 라이온즈나 타이거즈의 올스타급 타선을 상대하면서도 도무지 기세에 말리는 법이 없고, 대량실점을 하면서도 괴로워하거나 난감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자는 듯 또다시 빈구석을 노려오는 그의 선한 얼굴에 타자들은 제풀에 질려가곤 했다.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얼굴로 기 싸움에 지레 움츠러드는 법 없던 강심장과 부동심이야말로 그의 노련한 두뇌피칭의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그의 강인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부실한 인천마운드가 그나마 자포자기의 붕괴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늘에서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란 삼총사가 성장했고, 다시 김홍집과 정민태가 떠올랐다. 그는 비록 큰 빛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가장 빈곤했던 시기 인천야구의 대들보가 되어준 부산의 거목이었다. 고교야구의 스타플레이어가 프로무대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한 경기의 승리에 모든 미래를 걸어야 하는 피비린내 나는 승리지상주의가 연골과 인대를 갈아먹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빛나는 자리의 중독성이 거친 찬바람에 대한 내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최고중의 최고라고 불렸던 선수가 그늘에서 묵묵히 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양상문이 고교무대에서 쌓은 업적은 단연 최고중의 최고였고, 핀토스와 돌핀스라는 팀은 그늘이 짙은 땅이었다. 그리고 그 어둑한 땅에 내쳐졌을 때, 그의 어깨는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승부를 걸었고, 그 승부를 즐겼다. 프로란 모름지기,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04년부터 두 해 동안 자이언츠의 감독을 지내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을 알아볼 사람이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거나 선수로서 그의 모습을 떠올릴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짧지 않은 프로야구의 역사 속에서, 그만큼 되새기는 맛이 깊은 선수도 아주 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래저래 비록 프로무대 아홉 시즌동안 63승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거두었을 뿐인 양상문에게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쳐주고 싶은 이유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양상문 두뇌피칭 태평양 돌핀스 롯데 자이언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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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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