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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전직 대학교수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판사 습격' 사건의 발단이 된 수학문제 출제 오류 논쟁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균관대는 1995학년도 대학별고사 수학Ⅱ의 7번에 서술형 주관식 문제를 출제했다. 당시는 대학별 본고사가 시행되던 때였다.

@BRI@문제는 "영벡터가 아닌 세 벡터 a, b, c가 모든 실수 x, y, z에 대하여 |x a + y b + z c|≥ |x a| + |y b|을 만족할 때, a⊥b, b⊥c, c⊥a 임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의 전제 조건은 `영벡터가 아닌 세 벡터 a, b, c가 존재해 모든 실수 x, y, z에 대하여 |x a + y b + z c|≥ |x a| + |y b|을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 조건에 나온 부등식이 모든 실수 x, y, z에 대해 항상 성립한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면 a, b, c는 모두 영벡터일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문제의 전제 조건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채점위원이던 김명호 당시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는 이를 지적하고 이 문제에 대해 전원 만점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 측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나름의 `모범답안'이라는 것을 내놨다.

"해당 문제를 `영벡터가 아닌 세 벡터 a, b, c와 모든 실수 x, y, z에 대해 조건명제 p이면 조건명제 q'라는 방식으로 바꿔 쓰도록 하자. 그런데 전제조건 p를 모든 실수 x, y, z에 대해 만족하는 영벡터가 아닌 벡터 a, b, c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조건명제 p의 진리집합은 공집합이다. 이는 조건명제 q의 진리집합의 부분집합이다. 따라서 `p→q'라는 조건명제는 참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학교측이 `모범답안'이라고 내놓은 것은 `문제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라'는 내용인 것이다.

김씨 재임용 탈락 당시 서울대 등 전국 44개 대학 수학과 교수 1백89명은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성균관대에서 제시한 `모범답안'은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김씨의 이의 제기는 정당했으며 이를 둘러싼 갈등이 인사에 영향을 미쳤다면 매우 잘못됐다"라는 내용의 연판장을 당시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김씨의 재임용 탈락이 1997년 들어 세계 수학계에 알려지면서 한국 수학계와 과학계가 `국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세계 양대 과학지 중 하나인 `사이언스(Science)'는 `올바른 답의 비싼 대가(The High Cost of a Right Answer)'라는 제목으로, 수학 분야 국제학술지 `매서매티컬 인텔리전서(Mathematical Intelligencer)'는 `정직의 대가?(The Rewards of Honesty?)'라는 제목으로 김씨 해직 사건을 다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모두 김씨를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 등이 1997년 당시 1심 재판부로부터 의견 제출 요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회피하자 세계 수학계의 거장들이 한국 학계의 자정 노력을 촉구하는 항의성 서한을 잇따라 보낸 일도 있었다.

미국수학회 회장을 지낸 로널드 루이스 그레이엄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석좌교수는 "해당 가정이 만족되는 경우가 없고 해당 문제를 채점에서 제외하거나 모든 수험생을 만점 처리했어야 한다는 김씨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내 의견"이라고 말했다.

수학의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기고 유명한 학부 및 대학원 교과서를 여러 편 저술한 서지 랭 예일대 명예교수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국제 수학계에 호소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확대됐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행한 일"이라며 김씨를 옹호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하학자 중 하나로 평가되는 마이클 아티야 에딘버러대 명예교수는 "한국 과학의 국제적 입지와 평판을 위한다면 김 박사 사건을 조사하고 김 박사에게 합당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한국 과학계는 이런 항의와 조언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이것이 결국 10년 뒤 `법관 테러'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solat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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