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突風). 갑자기 세게 부는 바람. 어디선가 문득 나타나 단숨에 맨 위와 맨 아래를 뒤집어놓는 귀신같은 바람.

 땅에 닿을 듯 팔을 휘둘렀던 194cm의 장신투수, 박정현
ⓒ 사진제공 : 박정현

그동안 프로야구가 스물여섯 해를 지나오며 야구평론가들의 연초 예측대로 얌전히 흘러가 마무리된 시즌이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어느 해든 지나간 한 시즌을 회상하고 정리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어가 '돌풍'이다. 아마도 애초 예상과 마지막 결과 사이에 벌린 그 간격의 민망함을 채워줄 수 있는 단어가 '돌풍' 밖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프로야구사 26년 속에 가장 강력했던 '돌풍'의 기억을 꼽는다면 89년의 태평양 돌핀스 앞에 놓일 팀이 없다. 물론 이런 단언 앞에서 83년의 삼미 슈퍼스타즈, 92년의 롯데 자이언츠, 94년의 LG 트윈스, 혹은 91~92년의 쌍방울 레이더스를 기억하는 팬들이 눈초리를 씰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한 무대에서 검증된 스타들이 이끌어낸 돌풍은 비록 돌핀스보다 더 강렬하고 거친 것이었다고 해도 사실 어느 만큼은 예보된 바람이었을 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본 프로야구 15승 투수 장명부나 아마추어 최고의 선수 염종석, 유지현, 김재현 등이 무대를 옮겨 몰고 온 바람은 '돌풍'보다는 이미 예고된 '태풍'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트리오를 중심으로 89년 돌핀스가 만들어낸 기적은 '돌풍'이라는 표현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만큼 그것은 극적이고 신선했다. 그 해도 개막 전 돌핀스는 두말 할 것 없는 자타공인의 꼴찌 팀이었고, 그들 삼인조 역시 무명의 신예들이었기 때문이다.

자타공인의 만년 꼴찌 돌핀스

한두 번의 실패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잦은 실패는 관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관성이 절대 그 이상 올라설 수 없다는 단단한 한계선을 마음속에 만든다면, 그때는 이미 구제불능의 지경에 이르고 만다.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청보 핀토스를 거쳐 태평양 돌핀스에 이르기까지, 80년대에만 세 번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인천 야구팀이 프로 창설 이후 88년까지 일곱 해 동안 거둔 성적은 다섯 번의 꼴찌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번 중에 그나마 한 번(83년)은 장명부의 '원맨쇼'로 일구어낸 3위였지만 다른 한 번(86년)은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 덕에 간신히 꼴찌만 면한 6위였다. 돌핀스는 너무 잦은 실패와 불운에 멍이 들어 있었다.

물론 원년의 영웅 양승관이 부상과 재기를 반복하면서도 연패의 사슬을 끊는 한 방을 쏘아 올려 주고 있었고, 김바위, 정현발 같은 이적생들이 재기의 반짝 활약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대타전문요원으로 시작한 김동기가 점차 미래의 주전 포수감으로 성장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들이 불러올 수 있는 것은 뜬금없이 일어났다 스쳐 지나가는 도깨비 바람일 뿐, 승리의 희망은 아니었다.

89년을 앞두고 태평양 돌핀스는 2군 감독을 제외한 코칭스태프 전원을 교체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신용균, 이종도, 최주억, 정현발, 박상열을 비롯한 코치진에 프론트 직원 선임까지 신임 김성근 감독에게 일임하는 초유의 조치였다. 이른바 '김성근 사단'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혁신을 통해 구단이 기대한 것은 우승도 아니고 포스트시즌 진출도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탈꼴찌'였다. '8번째 시즌 만에 연고팀 사상 세 번째 탈꼴찌'라는 거창한 목표. 물론, 그런 소박한 목표마저 시즌 전 대부분의 전문가들에게는 비웃음거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88년 겨울, 오대산에서의 얼음물 담금질

@BRI@그 해의 돌풍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김성근 감독 단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즌 전 겨울, 해외전지훈련을 떠난 다른 팀들과 달리 오대산에 훈련캠프를 차렸다. 선수들은 하루 열 시간씩 산과 씨름했고, 땀에 젖은 몸은 계곡물 얼음을 깨고 들어가 식혔다. 그리고 그렇게 격한 고통과 맞부딪쳐 꿈틀대는 몸 안에 담긴 정신을 담금질했다.

물론, 패배의 관성에 젖은 선수들이 '지옥훈련'인들 능동적일 리 없었다. 그럴 때면 이종도 코치가 먼저 물 속에 들어가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댔고, 기가 질린 선수들도 도살장 끌려가는 표정으로 옷을 벗어내려야 했다.

김성근은 그가 가는 곳마다 그랬듯 '벌떼작전'을 완성했다. 다른 팀에서 한 것과 다른 것이 있었다면 투수가 아닌 타자를 벌떼처럼 동원했다는 점이었다. 그 구상의 핵심은 원원근, 여태구, 류동효, 곽권희 같은 신인급 타자들이었다.

벌떼 작전이란 거목이 없는 공백을 우거진 잡목으로 메우는 전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취약점을 메우는 방어전술이지, 이기는 무기가 되지는 못한다. 김성근이 아무도 몰래 날을 세워놓고 있던 필살기는 세 명의 무명투수였다. 바로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그는 그 세 투수를 위해 인천구장 외야 펜스를 3m 높여 세웠다. 투수전에 승부를 건 것이다.

87년 입단한 좌완 최창호는 두 시즌동안 평균 8점대의 평균자책점에 2패만을 기록하고 있던, 그리 '유망할 것도 없던' 중고신인이었다. 그리고 89년 원광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정명원은 투수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였다.

유신고 시절 황금사자기 4강을 이끌며 제법 쓸만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박정현도 데뷔 첫해인 88년에 고작 18.2이닝을 던지며 무려 16점의 자책점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단 1패, 그리고 7.71의 평균자책점이었다.

그러나 88년 2군 리그에서 돌핀스의 '원투펀치'로 활약하며 투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 최창호와 박정현은 김성근 감독에게 확실한 '감'을 주고 있었다. 정명원 역시 190cm에 가까운 장신에서 내리꽂는 정통파 투구자세가 신선했다. 그 해, 이름값 높던 임호균, 양상문, 최계훈, 김신부를 밀어내고 듣도 보도 못한 새얼굴로 팀의 1,2,3선발을 구축한 돌핀스는, 이미 '돌풍' 이전에 '경악'의 팀이었다.

마치 '학춤'을 추는 듯했던, 194㎝의 잠수함

 89년 신인왕 선정 당시. 옆은 정규리그 MVP로 선정된 선동열.
ⓒ 사진제공 : 박정현
그 중에서도 박정현은 이래저래 볼거리였다. 투수 중에서는 가장 컸던 194㎝의 장신을 한껏 구부려 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동작으로 공을 뿌리는 그의 모습은 흡사 '학춤'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그 긴 팔에 휘둘려 날아드는 공은 타자의 시야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으로 대각선을 그려가며 뻗고, 또 휘었다. 그 시원시원한 궤적의 변화구로 그가 거둔 성적은 19승과 2.15의 평균자책점이었다.

그 해 그보다 나은 성적을 거둔 투수는 여느 때처럼 선동렬이 있었고, 그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최창호와 정명원이 각각 10승과 11승을 거두며 평균자책점 3, 4위로 뒤를 이었다.

가장 적은 실점을 한 세 명의 투수로 40승 '밖에' 거두지 못한 것은 여전한 타선 때문이었다. 팀 타율 꼴찌에 타격 20위권 내에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돌핀스의 허약한 타선은 '무실점이면 이기고 두 점 주면 진다'는 독한 각오를 심어준 것 외에 별 힘이 되지 못했다.

큰 도움이 못되기로는 그 세 신인투수를 뒷받침해주었어야 할 다른 투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무려 47번이나 되었던 1점차 승부를 지켜내기 위해 각각 200이닝 이상씩 던져야했던 무리 역시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박정현은 그렇게 불가피했던 무리한 투구, 그리고 고교시절 그 키에도 70kg을 채 넘지 못했던 빈약한 체격과 체력 때문에 선택한 그 투구폼은 생각지 않게 허리에 문제를 만들고 있었다. 그 기다란 몸을 매 경기 백 수십 번이나 접고 펴는 동작이 허리에 무리를 가져오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인천 연고팀 역사상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도전했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도 그는 14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텨내며 역사적인 1승을 새겨냈다. 그리고 2차전을 내주고 다시 맞붙은 3차전, 4회에 원아웃 1,3루 상황의 위기가 닥치자 또다시 자진등판해 불을 끈 그는 승리를 굳힐 점수가 나주기를 기다리며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야속한 타선은 끝내 터지지 않았고, 1-1로 맞선 9회초 투아웃 상황에서 드디어 그의 허리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정규이닝 마지막 한 타자를 남긴 상태에서 두 무릎을 잡고 고개를 숙인 박정현은 끝내 웃는 얼굴로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대로 부축을 받으며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곧장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심각한 디스크 증세라는 판정을 받고 말았다.

박정현이 실려 나가는 그 순간, 인천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내 복에 무슨 플레이오프냐'는 자조 섞인 한탄도 흘러나왔고, '박정현 어떻게 해'하며 떨리는 소녀들의 목소리도 섞여있었다. 그 승부는 돌핀스의 것이기 이전에 박정현의 것이었고, 다시 인천의 것이었다.

그 경기 10회 말, 투아웃 만루에서 신인 곽권희가 때린 타구는 중견수의 키를 훌쩍 넘겨 펜스 앞에 떨어졌다. 마치 유치한 스포츠영화의 상투적 결말처럼, 마지막 순간을 남겨두고 쓰러진 영웅에게 바치는 동료들의 마지막 선물인 듯 그렇게 경기는 끝났다.

그 순간 인천 도원구장을 뒤흔든 함성은 그저 흔한 승리의 환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에 겹쳐, 8년간 쌓이고 눌린 서러움과 한이 풀리는 해원의 환희였고, 박정현과 돌핀스가 만들어낸 드라마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배팅볼 투수가 된 신인왕

 박정현 투수의 투구모습
ⓒ 사진제공 : 박정현
그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박정현은 완전치 못한 허리로 공을 던졌다. 해마다 200이닝에 가까운 과로였고, 그 와중에 92년까지 4년 연속 두 자리 수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무리가 쌓여 92년 가을의 치명적인 재발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기나긴 부상의 터널로 빠져들어야 했다.

이후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8년 동안 그가 거둔 승리는 10번에 불과했다. 그나마 93년에는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고, 간신히 공을 잡게 되었을 때도 대부분은 2군과 재활군에 속해 있어야 했다. 게다가 유난히 잠수함 투수에 약했던 돌핀스 타자들을 위해, 때로는 가상의 박충식이나 이강철이 되어 배팅볼을 던지는 수모 역시 묵묵히 감당해야 했다.

눈물 젖은 빵을 씹게 해주는 힘은 대개 정상에 대한 꿈이다. 그러나 이미 정상에서 밀려난 이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박정현은 짧은 봄날 뒤에 찾아온 길고 서러웠던 8년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냈고, 99년, 결국 스승 김성근이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그동안의 노력을 증명한다.

비록 IMF구단 레이더스가 김현욱과 조규제를 팔아치운 공백이 만든 자리였고, 승리보다 패전이 훨씬 많았던 신통치 않은 성적이었지만, 7년 만에 처음으로 100이닝이 넘게 던지며 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던 것이다.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 연고팀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고 만다. 그리고 89년 기적의 영건 3인방 중 유일하게 남아서 우승을 맛볼 수 있었던 '인천 소방서장' 정명원은 '박정현, 최창호와 함께 우승하지 못해 아쉽다'며 울먹였다.

그 순간 최창호는 한국시리즈 패전으로 가라앉은 맞은 편 LG의 덕아웃에 있었고, 박정현은 레이더스에서 마지막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10년을 기억하는 이들을 눈물짓게 했던 한 마디였고, 다시 스포츠가 줄 수 있는 또 다른 감동의 한 종류였다.

13년, 그리고 열두 시즌동안 박정현이 기록한 승리는 65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숫자 안쪽에 새겨진 굵은 의미들을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충분히 '기념비'가 되고 '전설'이 되는 성적이다. 그로 인해 인천야구는 투수왕국이라는 자랑스러운 별명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천의 팬들 역시 패배에 굴하지 않는 근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잊혔을망정 유전자로 녹아든, 인천 마운드의 정신이다.

덧붙이는 글 사진은 현재 일산 주엽고 코치로 일하고 있는 박정현 선수가 직접 제공해주셨습니다.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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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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