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출범 당시 6개 구단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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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봄, 한국 프로야구 첫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가장 많은 전문가들이 꼽은 우승후보는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이었다. 70년대 초중반 대구상고와 경북고의 전성기를 일구어온 선수들이 고스란히 삼성 라이온즈의 선수명단을 채우고 있었고, 3년 후 서울 이전을 조건으로 충청도로 내려간 오비 베어스와 선수들을 2:1로 나누어가져야 했지만 국내 최대의 연고지인 서울을 근거로 한 청룡의 저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의 패권을 차지한 것은 라이온즈도 청룡도 아닌 베어스였고, 그런 작은 이변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박철순이라는 미국파 투수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 해 서울에서 열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국가대표 선수들의 프로 진출이 1년간 유보되어있는 상황에서, '국가대표로 소집되지 않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것이 라이온즈와 청룡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라이온즈는 장효조와 김시진을 국가대표로 내놓고도 이선희라는 특급 투수를 중심으로 황규봉과 권영호로 구축된 막강한 선발 트로이카를 갖출 수 있었고, 타선에서도 이만수를 중심으로 장태수 배대웅 오대석이 수준급 라인업을 채우고 있었다. 청룡의 마운드는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 하기룡을 중심으로 백전노장 정순명과 국내 최고의 잠수함 투수 이길환으로 짜여 있었다. 그리고 타선은 국가대표로 선발된 김재박과 이해창의 공백이 크긴 했지만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지냈던 백인천이 '감독 겸 선수'로 합류해있었고, '준국가대표급' 공격형 포수인 유승안과 상무 제대 날짜를 받아놓은 이광은이 있었다. 프로야구 첫 개막전, 1982년 3월27일 그날 @BRI@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 역사적인 한국 프로야구의 출발은 그 두 팀의 승부로 막을 올렸다. 1회 초, 청룡의 선발은 전날 복통을 일으킨 에이스 하기룡을 대신한 이길환이었고, 라이온즈의 첫 타자는 천보성이었다. 그리고 이길환의 첫 투구와 천보성의 첫 내야플라이 아웃을 시작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모든 '첫번째' 기록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라이온즈는 예상대로 강했다. 첫 안타와 첫 홈런의 주인공 이만수를 앞세워 7대 1까지 앞서나갔다. 청룡은 선발투수 이길환에 이어 구원 등판한 유종겸까지 통타당하며 무너지는 등 라이온즈 선발 황규봉의 공을 좀처럼 공략해내지 못했다. 청룡이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7회말이었다. 5회에 터진 유승안의 적시타와 6회 백인천의 홈런으로 7대 4까지 따라붙었던 청룡은 그 날 유난히 감이 좋았던 4번 타자 유승안의 석점짜리 홈런으로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라이온즈는 최동원 이전까지 국내 최고의 투수로 통했던 이선희를 내보냈다. 이선희는 기대대로 8회와 9회를 실점하지 않고 넘겼지만, 두 번 모두 만루의 기회를 허용하며 흔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미 국가대항전과 실업 무대에서 충분히 혹사당한 어깨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고 차가왔던 그 날, 정상적으로 공을 던질 수 없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연장 10회말, 선두타자 김인식은 '데드볼왕' 전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로 첫번째 몸에 맞는 공을 맞고 나가 후속타자 김용달의 안타를 2루타로 만들어내는 베이스러닝을 선보였다. 3번 김바위가 짧은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다음 타석은 그 날 홈런 포함 4타점의 주인공 유승안이었다. 라이온즈의 고민... 유승안이냐, 백인천이냐 한 점만 주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 이선희의 선택은 '유승안이냐 백인천이냐'로 집약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백인천이었다. 물론 그 시즌이 끝났을 때는 0.412라는 전설적인 타율의 타격왕 겸 홈런 2위의 위업을 쌓게 되는 백인천이지만, 그 시점에서는 40세의 '늙은 호랑이'일 뿐이었다. 그보다는 당일 4타점의 유승안이 더 두려운 존재였다. 이선희는 공 세 개를 멀찍이 빼냈다. 그냥 걸려 보내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다음 타석에 들어설 백인천도 그냥 걸어 나가라는 사인을 보냈다. 상황은 분명했다. 투수는 공을 빼고, 타자는 기다렸다가 걸어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이선희는 예정대로 네 번째 공도 어림없는 코스로 던졌다. 포수 이만수가 공을 받기 위해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유승안은 순간 개막전 MVP에게 걸려있던 상품인 오토바이를 떠올렸고, 그 엄청나게 높은 공에 파리채를 휘두르듯 방망이를 돌렸다. 엉덩이가 쑥 빠진 채 돌아간 방망이에 걸린 공은 힘없이 투수 앞으로 굴렀고, 홈으로 뛰어들던 김인식이 횡사당해야 했다.
 82년 광주 올스타전에서의 이종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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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투아웃 1·3루. 이선희는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껄끄럽던 후속타자 백인천을 고의사구로 걸려 만루를 만들었고, 그야말로 자신있게 선택한 6번 타자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이종도였다. 이선희보다 세 살 위였던 이종도는 이미 실업무대에서 숱하게 이선희와 만나왔다. 물론 대개는 '완벽'을 자랑하던 이선희의 승리였고, 그것은 그 순간 이선희가 가지는 자신감의 근거이기도 했다. 그 순간, 몰린 상황은 이선희의 것이었지만, 더 독한 오기로 뭉쳐있는 사람은 이종도였다. 공 두 개가 연이어 스트라이크존을 스치듯 유인했지만 이종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밀어내기로 경기를 끝낼 수도 있는 상황, 이선희는 3구를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넣어야만 했다. 오른쪽 타자의 무릎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는, 그래서 알고도 못 쳤다는 몸쪽 슬라이더가 이선희의 주무기였다. 3구는 살짝 휘면서 이종도의 무릎을 향했다. 그러나 숨죽인 채 그 공 한 개를 노리던 이종도의 방망이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고, 공은 배트를 맞는 순간 유성처럼 하늘을 갈라 중계방송을 하던 아나운서가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하는 수선을 떨 시간조차 주지 않고 왼쪽 담장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프로야구 최초이자 유일한 개막전 끝내기 만루홈런. 독기 품은 이종도가 쏘아올린 '끝내기 만루홈런' 그 한 방의 홈런은 여러 사람의 운명을 갈라냈다. 그 해 이선희가 맞을 비운의 출발점이 되었고,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경거망동했던 청룡의 개막전 4번 타자 유승안은 졸지에 후보신세로 밀려나고 말았다. 대신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 직접 4번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1등 공신 이종도는 개막전 MVP 상품인 오토바이를 몰고 돌아갔을 뿐 아니라 5번 타순으로 승격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개막전의 깜짝 스타로 떠오른 이종도는 지난 76년에 실업 통산 1000번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던 일과 결부되어 '행운의 홈런타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그 전형을 떠올릴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프로개막 이전까지, 고교생 시절부터 대학무대를 거쳐 실업무대까지 십수 년간 강타자로 이름을 날려 온 선수였다. 그리고 포수로서의 능력도 수준급이었고, '공격형 포수'로서는 드물게도 빠른 발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단기 대회에서는 홈런왕과 타격왕은 물론 도루왕도 종종 차지하는 재주꾼이었다. 심지어는 나이 서른에 시작된 프로무대에서 첫 해에 그가 거둔 성적도 0.324의 타율에 11개의 홈런, 그리고 21개의 도루였다. 0.313의 타율에 17개의 도루를 기록한 이광은으로부터 시작해 0.412의 타율에 19개의 홈런을 날린 백인천을 거쳐 이종도에 이르는 청룡의 3,4,5번은 원년 6개 구단 최강의 클린업트리오였다. 그러나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그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중에 아무 것도 특출나게 뛰어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씩으로 잘라 보자면, 그가 가진 능력 중 어느 것도 '최고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지만, '대타 요원으로 활용 가능한 백업포수'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지는 못했다. 우선 그는 프로개막과 더불어 포수라는 포지션을 잃어야 했다. 프로팀 청룡에는 개막전 4번타자 유승안 외에도 김용운이라는 수비형 포수가 버티고 있었고, 이종도는 타격에서는 유승안에, 수비에서는 김용운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는 외야수로 전향해야 했고, 이따금은 내야수로도 들락거리며 떠도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82년, 83년 두 해 동안 3할 대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것을 제외한다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프로무대에서 단 한 개의 개인타이틀도 차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기록이나 인상적인 장면도 더 이상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개의 야구팬들에게 이종도란 '개막전 끝내기 만루홈런' 이상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선수인 것이다. 특출하지는 못했지만, 투지만은 빛났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선수단을 응집시키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어디서나 주장을 맡거나 혹은 팀의 정신적인 구심 역할을 했다. 예컨대 원년 22연승의 주역인 '불사조' 박철순은 자신에게 야구에 대한 집념을 가르쳐준 것이 이종도 선배였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공군 야구팀에서 함께 야구를 하던 시절, 매일 엄청난 양의 훈련에 지쳐 나가떨어진 후배 박철순에게, 이종도는 '이왕 시작한 것, 죽도록 한 번 해보고 나서 그만두어도 후회가 없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다시 묵묵히 앞서 뛰는 선배였다는 것이다. 이종도는 훈련과 승부에 집중하는 독특한 근성과 카리스마를 가진 선수였고, 그것으로 수많은 동료와 후배들을 각성시키고 분발시켰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야구선수로서 최고 수준의 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예컨대 그를 보며 자극을 받았던 박철순을 비롯한 후배들에 비해 그의 흔적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자신의 소신처럼 '죽도록 덤벼든' 투지가 있었기에 실업통산 1000호 홈런과 프로통산 1호 끝내기 만루홈런의 주인공도 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동료와 후배, 제자들을 통해 우리 야구사를 살찌울 수 있었음에 그 역시 우리 야구사의 쉽게 넘길 수 없는 한 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단언컨대, 성적이란 최소한 1%는 훨씬 넘을 듯한 재능과, 당연히 99%에는 훨씬 미달할 노력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성공의 비결이 99%의 노력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이 부정된다고 해서 결코 허무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우리가 결국 배우고 감동하는 것은 성적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스며있는 노력의 흔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종도 고려대 감독.
ⓒ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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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종도 끝내기 만루홈런 프로야구 개막전 이선희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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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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