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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중치우제마다 열리는 샤오황 '동족대가' 경연. 작고 초라하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행사이다.
ⓒ 모종혁
중국 서남부 윈꾸이(雲貴)고원의 한 자락에 있는 꾸이저우(貴州)성.

인구 3900여만 명이 살고 있는 이곳은 한국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첫째는 중국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둘째는 중국의 대표적인 국주(國酒)인 마오타이(茅台)의 고향으로.

꾸이저우는 기원전 전국시대부터 초나라의 '검중지지'(黔中之地)라 지칭되어 오늘날 일명 '첸성(黔省)'이라 불린다. 산지가 전체 면적의 87%를 차지하고 서고동저의 산악 석회암 지대가 다수인 꾸이저우는 인구의 38%가 소수민족이다.

꾸이저우에는 인구 100만명 이상의 소수민족만 먀오(苗)족, 부이(布依)족, 동(侗)족, 투자(土家)족 등 다섯 개에 달하고 30여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광시좡(廣西壯)족자치구, 윈난(雲南)성 다음으로 소수민족이 많은 지역이다.

작년 9월 중치우제(中秋節)라 불리는 중국의 추석 때 꾸이저우로의 특별난 여행을 다녀왔다. 이미 수차례 꾸이저우를 가보았지만 구태여 명절에 그 곳을 찾은 것은 오랜 세월동안 꿈꿔왔던 작은 소망 때문이었다. 바로 꾸이저우에서도 가장 오지인 첸동난(黔東南)먀오·동(侗)족자치주의 한 산골마을 소수민족 행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8시간만에 도착한 동족 거주지 총장현

▲ 총장현으로 향하는 한 산턱에서 바라본 꾸이저우의 고산지대.
ⓒ 모종혁
중치우제 하루 전날인 음력 8월 14일 기자는 꾸이저우성 수도인 꾸이양(貴陽)을 출발했다. 꾸이양에서 목적지인 첸동난자치주 총장(從江)현까지는 450km. 아침 9시에 출발한 고속버스는 첸동난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카이리(凱里)까지 놓인 4차선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카이리를 지나 고속버스는 돌연 2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 뒤 이어진 좁은 산길. 포장된 도로지만 길은 산 속으로 이어지고 굴곡이 심했다. 꾸이저우는 서부의 평균해발이 1500~2800m이고 동부는 500m 안팎이다. 하지만 첸동난자치주에는 해발 2000m가 넘는 산이 허다하다. 이런 산들을 오르는 버스는 S자형 도로를 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 첸동난자치주의 한 동족 마을. 이 지역은 물질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다.
ⓒ 모종혁
오후 늦은 시간 한 작은 먀오족 마을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정차한 버스, 멀지 않은 곳이라는 내 예상을 뒤엎고 끝없이 달렸다. 10개 가까운 산을 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협곡과 계곡을 지나 버스는 꾸이양을 떠난 지 8시간이 다 되어서 총장현에 도착했다.

작은 강을 낀 총장현청은 꾸이저우 뿐만 아니라 후난(湖南)성, 광시자치구에 걸쳐 살고 있는 동족의 주거주지다.

동족은 전체 인구가 300만이 갓 넘고, 인근의 좡(壯)족·수이(水)족과는 형제지간이다. 자민족의 문자가 없는 동족은 남북 두 개의 방언을 구사하고 다신과 자연물을 숭배하는 원시종교를 신봉한다.

제대로 된 명절을 지내는 동족의 추석

▲ 멀리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샤오황.
ⓒ 모종혁
다음 날인 중치우제 아침. 임대한 차량를 타고 최후 목적지인 샤오황(小黃)으로 향했다. 총장현청을 떠난 차는 곧바로 험한 비포장 산길로 들어섰다.

함께 길을 나서 한족 운전기사 까오헝송씨는 "총장에서 샤오황까지는 30여㎞ 밖에 안 되지만 워낙 길이 험준하고 곳곳이 1차선이라 2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알려줬다. 그는 "샤오황 가는 버스는 하루에 3번밖에 없다"면서 "그래도 요즘은 밖으로 많이 알려져서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동족의 건축물 고루. 어느 곳이든 동족이 사는 마을에는 주민들의 회합 장소인 고루가 있다.
ⓒ 모종혁
동족은 중국 소수민족으로는 드물게 명절다운 중치우제를 지내는 민족이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우리의 추석인 중치우제가 별다른 의미가 없어졌다. 공휴일이 아닌 이 날에 한족들은 가족들이 모여 유에빙(月餠)을 먹고 서로의 안부를 나눌 뿐이다. 명맥을 유지한 우리의 설날격인 춘지에(春節)과 달리 중치우제의 전통과 풍속은 이미 사라졌다.

이런 한족들과 달리 동족은 중치우제 아침 일찍부터 조상에 대한 감사의 예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해 농사를 살펴주고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 조상신을 위한 간단한 의식을 치른다. 이어 가가호호 사람들은 집을 나선다.

동족이 사는 모든 마을의 중앙에는 주민들이 회합할 수 있는 고루(鼓樓)와 광장이 있다. 광장에 모인 동족 사람들은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흥겨운 축제를 벌인다.

동족 여인들은 어릴 때부터 민속의상만드는 법을 배운다. 천을 천연염료로 물들이고 다듬은 뒤 자줏빛 광택이 나는 옷감에 수를 놓아 몇 년에 걸쳐 옷을 완성시킨다. 이처럼 동족 여인들의 수놓는 솜씨는 숙련된 것이어서 지금도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680가구에 26개가 활동하는 주민 합창단

▲ 남녀노소 불문하고 샤오황의 동족 사람들은 누구나 가수이자 명창이다.
ⓒ 모종혁
아침 8시에 출발했건만 샤오황에 도착하니 동족의 중치우제 축제는 이미 시작된 뒤였다. 축제의 개시를 알리는 남성들이 부는 대나무 피리인 루셩(芦笙)의 향연은 벌써 끝났고 소싸움이 한창이었다.

중국에 건너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소싸움을 구경한 경험이 몇 차례 있다. 동족의 소싸움도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후 3시가 좀 넘어서 샤오황만의 중치우제 행사가 시작됐다. 총장현청에서 벌어지는 동족의 또다른 중치우제 놀이인 용선경기(용머리를 단 중국식 카누의 경주)를 제쳐두고 샤오황을 찾은 이유는 오직 하나, '동족대가'(侗族大歌) 때문이다.

▲ 초라하지만 의미있는 샤오황 '동족대가' 무대.
ⓒ 모종혁
동족은 음악적 재능이 남다르다. 자신들만의 문자가 없는 동족은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풍속·정서 등을 노래에 담아 전승해왔다.

동족의 노래들은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고 1년 사시사철마다 있는 축제 때 집안에서 마을에서 불려졌다. 샤오황의 동족대가는 그 의미가 특별나다. 한자로 '대가(大歌)'는 동족어로 신성한 노래라는 뜻으로, 샤오황의 동족 사람들이 조상을 기리는 중치우제와 아주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2003년 현재 샤오황의 인구는 주변 마을까지 합쳐서 680가구 총 3300여명인데, 동족대가를 부르는 유명한 합창단만 26개나 있다. 동족의 역사와 민족정서를 담은 1백여 곡의 동족대가를 부르는 이들은 모두 주민들 스스로 결성했다.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 지역 문화예술 공연단처럼 정부가 나서서 조직하지 않은 것이다.

한족의 침탈과 탄압에도 지킨 '동족대가'

▲ 샤오황 '동족대가'는 서구 언론에도 알려져서 이를 보기 위해 서양인 관광객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찾는다.
ⓒ 모종혁
지난 1950년대에서야 조금씩 외부로 알려진 샤오황 동족대가는 오늘날 중국뿐만 아니라 서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1996년 중국 문화부는 샤오황을 '중국민간예술의 고향' 중 하나이자 '동족 노래의 고향'으로 지정했다.

오랜 세월동안 한족의 문화적인 침탈과 공산주의의 서슬 퍼런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지킨 동족의 전통과 문화가 빛을 본 것이다.

중치우제 경연장에서 만난 중국 민속음악전문가 판녠잉씨는 "샤오황에서는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아기를 위해 계속 노래를 부르고 아이가 3~4살이 되면 어린이 합창단에 정식으로 들어가 노래를 배운다"고 말했다.

그는 "아주 어린 아이부터 나이든 노인까지 명창인 샤오황 사람들의 동족대가에는 민족의 문화와 풍속뿐만 아니라 민중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면서 "동족대가는 동족 역사와 풍습, 민족 정서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말했다.

샤오황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동족대가 경연을 벌였다. 그 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하늘에 뜬 보름달을 보면서 자신만의 소원을 기원했다. 나 또한 동족의 고유한 문화가 퇴폐한 황금문명과 한족문화에 물들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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