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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더기의 폐지를 싣고 고물상으로 향하는 할아버지
ⓒ 안가희
15일 새벽 5시. 정환용(83, 가명) 할아버지는 한겨울 새벽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다. 갑자기 불어 닥친 동장군에 할아버지의 귀와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새벽 5시 30분, 첫 차가 당도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꽁꽁 언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더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일터는 지하철 안이다. 곧바로 할아버지는 훈련된 병사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지하철 선반의 무료신문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정 할아버지는 아내와 둘이 산다. 무료신문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폐지가 많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생계를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무료 신문 폐지 1kg당 가격은 40원 정도. 정 할아버지는 하루에 7000~8000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고 했다. 종로의 극장가 뒷골목 곰탕 가격은 1000원. 깍두기 반찬에 밥을 말아주는 간단한 식사이지만 정 할아버지에게는 안성맞춤인 한 끼 식사다.

정 할아버지의 1차 수거작업은 오전 11시경에 끝났다. 정 할아버지는 자기 몸 만한 크기의 자루 4개를 리어카에 싣고 옮겼다. 정 할아버지는 고물상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은 뒤에야 식은땀을 씻어내며 한숨 돌린 듯 커피를 마셨다.

그곳엔 정 할아버지 말고도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곳곳에서 모인 무료신문이 마치 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날 수거해 고물상으로 넘어간 무료신문의 무게는 200kg. 정 할아버지는 1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았다. 정 할아버지는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받았다며 웃었다. '집으로 가시냐'고 묻자 "집에 가긴, 지금 가면 또 (무료 신문이) 잔뜩 쌓여 있을 텐데"하며 정 할아버지는 다시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증한 무료신문, 쌓여만 가는 수거노인들의 손수레 짐

@BRI@그동안 지하철역에서 무료신문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일부 시민들은 신문만 배포하고 수거는 등한시하는 무료신문사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 후 어느새 무료신문 수거작업은 노인들의 몫이 되었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에서 구부정한 허리와 주름진 손으로 단 하나의 신문이라도 더 걷어내려고 노인들이 까치발을 하고 신문을 끄집어내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만난 회사원 이종서(46)씨는 "출근시간대에 노인들이 신문을 수거하는 모습에 가슴이 짠해진다"면서도 "복잡한 출근 지하철에서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면서 먼지 나는 신문을 끄집어내는 행동이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홍유리(24)씨는 "지하철에서 무료신문은 들고 탄 지 1시간 이내에 버려지고 있으며 역마다 신문을 갖고 타는 사람, 내리면서 버리는 사람들이 얽히면서 무료신문이 수북하게 쌓인다"면서 "선반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놓인 신문을 청소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들뿐"이라고 말했다.

문화관광부에서 발행한 '문화미디어산업백서'에 따르면 2002년 <메트로>를 시작으로 2005년까지 17종류가 무료신문으로 등록돼 있다. 11월 창간한 <데일리노컷뉴스>까지 포함하면 수도권에만 모두 10종류가 있다.

초기에는 종류도 적고 발행 부수도 적어 지하철 종점에서 청소 아주머니들이 치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버려지는 무료신문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지하철역 에서 이 일을 책임지기 힘들어졌다.

서울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정용철 역장은 "무료신문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지하철에서 치우기 버거운 실정이지만, 노인 분들이 치우면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 게 사실"이라며 "무료신문을 지하철역 앞에서 배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2005년 한국신문협회 통계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무료신문의 발행부수는 347만부가 넘는다. 올해 11월에 새로 나온 <데일리노컷뉴스>와 지방 무료신문을 포함하면 발행부수는 400만부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 출근 지하철에서 무료신문을 보는 시민들
ⓒ 안가희
그러나 무료신문의 발행 부수는 대폭 늘었지만, 이른바 '뜨내기 독자'들은 대부분 무료신문을 출근길에서 잠깐 읽고 쓰레기 취급한다. 무료신문이 배포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신문을 버릴수록 할아버지들의 자루는 무거워진다. 그만큼 노인들이 신문을 수거하는 진풍경도 늘어날 것이다.

많은 무료신문들이 곧바로 버려지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없이, 이를 단지 출근길의 이색적인 풍경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필자들이 만난 한 일간지 기자는 "많은 학자들은 무료신문이 저널리즘의 본령을 해치고 언론시장을 교란시킨다고 비판한다"면서 "그래서 무료신문들이 쉽게 독자의 손에 들어가면서도 이전보다 더 쉽게 버려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학생 권시진(26)씨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무료라는 점은 좋지만 사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기사의 질이 떨어지는 것 같다"면서 "기사 내용을 보면 인터넷매체를 비롯한 다른 매체의 기사를 긁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으며, 기사 내용이 전문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 안병재(49)씨는 "무료신문 종류가 많아 중복되는 기사가 많다"면서 "기사 내용의 차별화에 신경 쓰지 않다보니 무료신문이 전체적으로 경쟁력이 저하되고, 그래서 시민들은 '똑같은 것이니 버려도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루 350만부 넘는 무료신문, 버려지는 이유 있다

▲ 선반에서 무료신문을 수거하는 할아버지
ⓒ 이정혜
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에서 발행하는 <여론의 여론>(반년간지) 취재팀은 올해 5월 대학생 358명을 대상으로 무료신문 이용 실태 및 기사 현황 등을 조사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던 5개 무료신문에서 자체 취재기사는 단지 16%뿐이었다. 무료신문 5개를 비교해본 결과 50% 이상이 동일한 기사이거나, 같은 소재의 기사였다.

또한 무료신문을 보는 이유와 관련, 358명의 대학생 중 68%가 무료이기 때문에 본다고 답했고 응답자의 99%는 유료로 전환한다면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고 중심으로 편집된 무료신문에 대한 대학생 독자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상업성이 짙게 편집된 무료신문이 독자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경우 궁극적으로 신문 산업 전체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무료신문들이 무작정 버려지고 폐지로 가는 과정은 한국 신문 산업의 진흥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박상건 서울여대 겸임교수(신문발전위원회 전문위원)는 "통신사 기사 등을 출처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자체 기사인양 게재하거나, 광고를 기사로 둔갑시켜 독자를 혼란케 하는 것은 언론윤리는 물론 신문법에도 저촉된다"면서 "신문인지, 정보지인지, 광고지인지 분명히 해야 하고,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교수는 "신문발전위원회에서는 현재 유가지와 무가지를 불문하고 기사와 광고를 혼동케 하는 편집과 제작 행태를 심의하고 있으며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에 대한 법적 제재에 들어갈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 수거된 무료신문의 폐지가 모이는 고물상
ⓒ 안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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