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할 수 없는 영광은 빛나는 훈장인 동시에 마음속을 잡고 늘어지는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한다. 80년대와 90년대 베어스 선수들에게 1982년 김유동의 역사적인 만루홈런과 70년대를 대표하는 대투수 이선희의 눈물 속에 얻은 짜릿한 원년 우승 축포의 감격은 그런 의미였다. 베어스는 99년 OB에서 두산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기는 했지만 라이온즈, 자이언츠와 함께 우리 프로야구사 25년의 세월을 변함없이 지켜온 전통 깊은 구단이다. 그 중에서도 원년 우승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품고 있는,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구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만큼의 높이인지 채 가늠하고 기다릴 틈도 없이 찾아왔던 빠른 영광 뒤에 그들을 기다렸던 것은 생각보다도 너무 길었던 겨울잠이었다. 우승 이듬해인 83년 5위로 추락한 것을 시작으로 84년 전후기 통합 승률 1위에 오르고도 원년의 숙적 삼성이 롯데에 고의로 져주는 '저격'에 주저앉은 우여곡절을 비롯해 무려 13년간이나 한국시리즈 진출을 봉쇄당하는 침체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1994년, 최악의 한 해 보낸 베어스
 82년도 우승 순간
ⓒ 두산 베어스
1994년은 베어스에 희망의 기운이 충만했던 해였다. 80년대의 불운에 지쳐 90년과 91년 두 해 연속 꼴찌로 주저앉았던 베어스는 93년 프로선수 출신 감독 1호인 원년멤버 윤동균을 중심으로 서울 라이벌 LG트윈스를 막판에 밀어내고 최종일에 3위로 올라서는 통쾌한 역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시즌 팀의 66승 중 혼자 32번의 승리를 지켜낸 철벽 마무리 김경원과 전성기에 들어선 김상진, 권명철, 강병규가 이끌어낸 2점대의 팀 방어율 그리고 신인 유격수 김민호와 김형석, 김광림, 김상호의 'KKK포'가 이끄는 타선은 팀의 재구성이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 신인' 윤동균의 작전능력이 빠르게 완숙해지면서 후반기 급상승 분위기를 이끌었던 것도 주효했다. 그러나 지난해의 희망을 이어 우승권을 넘볼 것으로 기대했던 94년은 베어스 역사상 아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바로 윤동균 감독의 체벌에 항명하며 선수들이 집단으로 이탈한 것이다. 선수들의 선수생명뿐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의 생명 자체가 위기에 몰렸던 그 사건은 결국 윤동균 감독이 퇴진하고 몇몇 선수들이 크고 작은 징계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남은 상처는 작지 않았다. 김형석이 써나가던 연속경기출장 신기록은 '622'에서 멈추었고 내내 2군에 머무르다 1군에 승격한 당일에 사건에 휘말린 거포 강영수는 오로지 선배의 책임감 때문에 맨 윗줄에 이름을 올린 죄로 방출되는 신세에 내몰렸다. 선배 출신 감독을 내몰았다는 곱지 않은 시선은 프로선수의 자긍심과 의욕을 갉아먹고 있었다. 사기는 바닥을 지나 땅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성적 역시 쌍방울 덕에 최하위를 간신히 면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95년 시즌을 앞두고 그런 베어스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해에도 관심의 초점은 '역대 최강전력' LG트윈스였다. 95년 대역전극의 원동력은?
 82년도 베어스 팬북 사진
ⓒ 두산 베어스

지난해의 18승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 김에 20승 고지에 올라선 이상훈을 중심으로 '기분 좋은 날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김태원과 '기분 나쁜 날에도 무너지지는 않았던' 정삼흠으로 구성된 선발 삼각편대에 차명석, 김기범, 차동철이 버티는 노련한 허리에서 김용수의 마무리로 이어지는 마운드는 역사 속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마땅치 않은 최강 중 하나였다. 물론 '방위병 출장 금지 처분'의 유탄을 맞고 균열이 생기기는 했지만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에서 한대화, 송구홍, 박종호로 이어지는 야수진도 빠질 곳이 없었다. 그에 비해 93년에 확인된 선수진은 빠지지 않는다쳐도 안에서부터 무너진 베어스는 하위권 예상팀이었다. 그러나 95년 시즌 베어스는 또 한번 트레이드마크인 '뒷심'을 발휘하며 시즌 막판에 숙적 LG 트윈스를 반 경기차로 제치고 1위로 올라서는 역전극을 재현했다. 무엇이 비결이었을까? 안으로부터 무너진 강팀이 되살아나 보여준 '돌풍 아닌 돌풍'의 진원지는 두 사람이었다. 윤동균 감독의 후임으로 급히 투입된 '화합의 전도사' 김인식 감독. 그리고 항명파동의 핵심이었던 '불사조' 박철순이 그들이었다. "감독님, 옷 벗으십시오. 저도 옷 벗겠습니다."(이하 박철순 선수의 말은 고 이종남 기자가 쓴 <이중노출>을 참조했으며 말투는 약간 바꿨으나 전달하는 의미는 그대로다 - 기자 주) 94년 9월 6일 양평의 한 콘도에서 박철순은 기자들을 향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뒤에 늘어서있는 베어스 선수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라. 내가 다 책임진다. 감독님하고 나는 원년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이야. 걱정 마라. 우리가 멋있게 끝낼 테니까." 평소보다 굵어진 목소리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훈련장을 이탈해 사흘째 콘도에 머물고 있던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콧물 훌쩍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박철순은 우리 프로야구가 만들어낸 첫 번째 스타플레이어였다. 1982년 실밥이 그대로 보일 지경으로 정지된 채 흘러들던 시속 100km 안팎의 '팜볼'과 원격조종으로 방망이를 피해가는 듯했던 '포크볼'은 만화에 나오던 '마구'가 허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자신을 불태우다
 박철순 선수의 투구모습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게다가 그런 '감속구'와 섞여 들어오던,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시속 140km대의 강속구는 체감속도 150km 이상으로 날아가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곤 했다. 그렇게 차원이 다른 공을 가지고 그는 22연승의 대기록을 비롯해 82년 80경기밖에 치르지 않던 시즌에서 24승을 쌓아올리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미 소진된 몸으로 원년 우승을 위해 경기장 밖에 세워둔 구급차에서 은밀히 주사를 맞아가며 공을 던진 끝에 얻은 허리 디스크.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 다섯 번이나 되풀이된 부상. 또한 세 번이나 거듭 절단된 아킬레스건. 그러나 원년의 기억만으로 '전설'이었던 박철순은 이미 몇 해 동안 이어진 구단의 은퇴와 코치직 제안에도 불구하고 2군을 오가는 수모를 겪으며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95년은 박철순의 한국프로야구 14년차였다. 95년 시즌을 앞두고 박철순은 비어있는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미 100승 투수 장호연은 물론 김형석, 김상호 같은 조카뻘 선수들보다도 적은 연봉을 받고 있던 박철순은 그나마 '내 몫'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을 이런 말로 다잡았다. "너희들 마음이 괴로운 것 다 안다. 야구 그만 두고 싶은 사람도 많은 것 안다. 그런데 야구선수는 박수를 받든 욕을 먹든 야구장에서 죽어야 하는 거다. 이만한 어려움도 없으면 성공의 기쁨도 없다. 우리가 손가락질 받는 선수에서 박수 받는 선수가 되는 길은 올해 야구 잘 해서 다시 우승하는 것뿐이다. 야구할 자격도 없는 놈들이라는 비난을 날려버리는 방법은 올해 우승하는 것뿐이다." 박철순은 양평 콘도에서 뭉쳤던 울분을 그대로 우승이라는 목표로 돌려세웠고 김인식 감독은 그것을 그대로 껴안았다. 그 해 베어스는 포기하지 않는 야구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신인 정수근과 3년차 김민호는 쉴 새 없이 상대 내야를 헤집었고, 김형석과 김상호는 주자들을 알차게 불러들였다. 2군에서 올라온 약관의 심정수는 곧장 21개의 홈런을 넘겨대며 무너진 상대 마운드를 다시 한 번 밟았다. 마운드에서는 17승의 김상진과 15승의 권명철이 앞장섰고, 김경원이 다소 주춤했던 마무리의 빈틈은 이용호와 진필중이 완벽하게 메워놓았다. 그리고 박철순. 그 해 박철순은 100이닝에 가까운 공을 던지며 9승을 올렸다. 때로는 선발로, 때로는 마무리로, 때로는 중간 계투로 등장하는 그는 한 명의 투수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의 집전관에 가까웠다. 투수교체를 알리는 장내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겹쳐 권인하의 목소리로 '에이스를 위하여'가 구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베어스 선수들과 관중들은 또 한 페이지 역사의 순간에 참례한다는 감격과 또한 알 수 없는 흥분에 달아올랐고, 상대팀 덕아웃은 자기 쪽 응원석마저 들떠가는 난감한 광경을 애써 외면하며 헛기침 속으로 잦아들곤 했다. 결국 베어스는 막강 트윈스를 반 경기차로 밀어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다시 트윈스를 잡고 올라온 자이언츠와 맞섰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가 항상 그랬듯 그 해의 한국시리즈도 지긋지긋한 혈전이었다. 7차전 최종전까지 이어지며 무려 5번이나 8회 이후에야 승부가 갈리는 열전이 거듭되었고 그런 난전 속에서 승자와 패자는 객관적 전력이 아닌 집념과 집중력에서 갈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3승을 먼저 올려놓고도 6차전 역전패를 당해 원점으로 몰려간 자이언츠는 정신력의 핵인 박정태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두 점을 헌납하며 무너졌다. 반면 베어스는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 대열로 무려 13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MVP로는 4할에 가까운 타격에 도루를 무려 6개 성공시키며 자이언츠 마운드와 내야를 교란한 김민호가 뽑혔다. 그러나 축포가 오른 순간 잠실구장의 주인공은 박철순이었다. 마운드의 권명철이 마지막 아웃카운트 한 개를 남겨놓은 순간 카메라가 포착한 얼굴 역시 덕아웃의 박철순이었다. 박철순, 이름만으로도 짙게 떨려오는 느낌
 은퇴식에서 마운드에 입을 맞추는 박철순 선수
ⓒ 두산 베어스
권명철이 마지막 손동일을 내야 땅볼로 잡고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 베어스 선수들은 김인식 감독을 헹가래 친 다음 박철순을 무동 태운 채 야구장을 달렸다. 그 순간은 짧게는 지난 해의 불운을 씻어내는 흥분이었고 길게는 82년 우승의 다음 장을 써 내리는 13년 베어스 역사의 한 획이었다. 이듬해인 96년을 마지막으로 박철순은 야구공을 놓았다. 97년 4월 29일 '인간'으로 돌아온 박철순은 더 이상 마운드에 뿌릴 뼛가루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불타오른 '야구선수' 박철순을 묻어놓은 무덤,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의 등번호 21번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번호로 비였다. 불사조, 영원한 에이스, 신화, 전설. 그의 이름 앞에 또 하나의 단어를 늘어세우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저 '박철순'이라는 이름, 그것만으로도 짙게 떨려오는 느낌. 바로 그 느낌이 닿는 곳까지가 '야구팬'이라는 집단의 영역일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 굳이 '베어스'라는 팀 이름이 부각되지 않더라도 베어스 팬들은 서운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베어스만의 것으로 독점하고 보면 그 울타리 밖의 야구역사가 너무 척박해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