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은밀히 그의 행적을 수소문 했으나 찾을 수 없어 까맣게 잊고 지낸 어느 날 홀연히 그가 찾아왔다.

“대감마님, 시생입니다. 그 동안 잘 계셨는지요?”
“자넨 그때 그 술사가 아닌가. 어디 있었기에 지금껏 소식이 없었는가. 이젠 내 곁에 있게. 부귀와 광영이 가득하니 함께 있음이 좋겠네.”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소신이 어찌 대감마님과 함께 있겠습니까.”
“하면, 어찌 찾아왔는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시생이 천기를 살피니 대감마님 신변에 이상이 올 수 있다는 괴이한 점괘가 떨어졌습니다. 시생에게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인출할 권한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뿐인가?”
“그것만으로도 과람합니다, 대감!”

대원군은 즉시 해인사 주지에게 관문(關文)을 내려 정만인에게 팔만대장경을 인출 · 감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대원군은 종친과 바둑을 두다 청(淸)나라 술사가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그 술사는 바둑을 두던 중 자신의 대마가 죽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희미하게 토했었다.

“대감께오선 갑자(甲子) 이전에 살만인(殺萬人;만 명을 죽임) 하셔야 평생이 부귀영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권세를 잡은 그에게 ‘살만인’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주교(天主敎)라는 서교(西敎)가 퍼지는 것을 보고 좌포장 이경하(李景夏)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게 했다. 수구문(水口門) 밖에 쌓인 시체가 성보다 높아지고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시체는 얼마 안가 만 명을 넘었다. 그로인해 대원군은 점점 힘을 잃게 되는데 청나라 술사가 말한 ‘살만인’이란 뜻이 그게 아니라는 걸 홀연히 깨달았다. 갑자 이전에 살만인하라는 것은 사람을 만 명 죽이라는 게 아니었다. 정만인(鄭萬人)이란 술사를 갑자년 이전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급히 사람을 풀어 정만인의 행처를 수소문 했으나, 그는 해인사에서 대장경 몇 질을 인출한 후 해인(海印;목인)을 가지고 사라진 후였다. 보고를 받은 대원군이 바둑 두던 손길을 멈추고 저 멀리 하늘가로 떠가는 흰구름을 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이인로의 <기국(碁局)>이었다.

우뚝 앉아 정신 모으니
세상사 일이 귀에 들리랴
소부(巢父) 허유(許由)의 숨을 곳
이 자리가 아니던가

기이하게도 이마니시의 집에 걸린 사진 틀 속의 인물에 <기국>이란 시가 쓰여 있었다. 도암이 멈칫거리며 뒷말을 찔러 넣은 건 자신의 말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 그 나라가 오늘날 부강해진 것은 바로 그 해인(海印) 덕분이란 말이 있네. 용왕이 준 도장 덕분에 일본이 경제대국이 됐다고 그림을 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

“그럼, 지금도 그 용왕의 도장이 조화를 부립니까?”
“거야 모르지.”
“예에?”
“아니야, 그 도장은 효력이 없을 거야. 효력이 있다면 일본이 침몰한다는 소문이 돌겠어? 하긴 일본 같은 나라가 지구상에 오래 남아있는 건 조물주의 실수지. 온갖 악행을 밥 먹 듯 저지르고 더러운 짓만 골라 하는 종족인데 하늘인들 가만있겠어. 용왕의 도장이 효험이 있다면 벌써 다른 일을 꾸미고도 남았을 거야. 안 그래?”

이렇듯 신당에 시왕(十王)으로 그려진 정만인이 <구사문> 사람이라면 그 의미는 상당히 미묘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자룡이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바꾸었다.

“이 벽화에 있는 수많은 별과 북은 28수(宿)와 33천(天)을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고려 시대 이후에는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쳤거든요. 인정이 우는 건 지금의 저녁 10시에 해당하는 시각으로 스물여덟 번을 종을 쳐 통행금지를 알렸고, 새벽 4시에는 33번의 북을 쳐 통행금지를 해제 시켰어요. 다시 말해 인정은 천지의 일월성신인 28수(宿)에 고하기 위해 스물여덟 번 종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서른 세 번의 북을 쳐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에 고하여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입니다. 벽화의 그림은 중생이 육신을 떠나 심판을 받는 49일에 좋은 결과를 바라는 뜻으로 그렸나 봅니다.”

“그러니까, 다섯째 말은 이곳이 누군가의 명복을 비는 신당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면 명복을 빌 인물이 범상치 않은데 누구지? 큰 형님 말대로 ‘정만인’의 명복을 비는 건가? 아님 다른 사람인가? 일단 무덤부터 찾아야겠구만!”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