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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오늘 하루가 각자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떤 유언을 남기고 싶은가?

2002년부터 문예지 '한국문인'에 연재된 원로·중진 작가 101명의 가상 유언장을 묶은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이 나왔다. 작가로서 엄격하게 살았는가를 반성하는 글부터 남길 말은 '무소유' 한 마디 밖에 없다는 글에 이르기까지 내용도 다양하다.

이 중에는 가족에게 쓴 글들이 많다. 소설가 유현종씨는 아들에게 남긴 가상 유언장에서 작가적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는가를 자문한다.

"폭압의 역사를 살아내면서 문행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산 것은 수치스럽고 창피하다. 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막아 싸웠어야 하는데 늘 주저하다가 뒤로 물러나 앉은 것이다."


유씨는 그러면서도 "나는 좋아하는 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아왔으니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되련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이 쓴 작품을 모두 찾아내 '한 벌'만 디스켓에 옮겨 무덤에 합장해달라면서 "쓰레기 같은 작품이어서 남 앞에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썼다.

소설가 한말숙씨는 자녀들에게 유언장을 썼다.

"수의는 엄마가 준비해 둔 것을 입혀라, 부의금은 절대 사절해라, 화장해서 재는 엄마가 아끼는 정원의 주목 밑에 뿌려라,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

시인 도종환씨는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쓴 책과 원고 등 문학과 관련된 자료들은 아버지와 함께 문학, 문화단체에서 일을 함께 한 아버지 후배들에게 공적 자산으로 전해 주거라. 내가 쓴 글 속에 담긴 정신을 네가 마음 속에 담아두면 그것으로 됐다."

소설가 공선옥씨가 큰 아이에게 남긴 가상 유언장은 엄숙하면서도 재미있다. 동생들 앞에서 의연할 것을 당부한 뒤 "그런 다음에 집안 청소나 깨끗이 하고 몇 가지 나물하고 밥하고 국하고, 그리고 물 한 그릇 엄마를 위해 딱 한 번만 차려주고 너희나 배불리 먹어라", "엄마가 정 생각나거든 어디 양지바른 강가에 나무 한 그루 심어두고, 오다가다 그 나무를 가꾸면서, 그게 바로 엄마거니 여기며 한 세상을 재미있게 살다가 이 어미랑 만났으면 싶다"는 글을 덧붙였다.

소설가 전상국씨는 자신이 쓴 소설들에 남겼다.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내 독자들을 내가 얼마나 두려워 했는가를 너희가 증언해 주기를 부탁한다."

문인들에겐 가장 뼈 있는 유언인 듯싶다.

이해인 수녀는 자신의 관 위에 꽃 대신 시집 한 권을 올려놓으면 어떨까 하고 묻는다.

"책들은 다 도서실로 보내면 되고 일기장들을 태우기 아까우면 보관했다 부분적으로 출판을 해도 될 것 같군요. 그 밖의 자질구레한 것들과 옷가지들은 태울 것은 태우고 관례 대로 처분하면 됩니다."


구상 시인은 2004년 작고하기 전 쓴 가상 유언장에서 "오늘이 영원 속의 한 표현이고, 부분이고, 한 과정일 뿐"이라며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자"는 글을 남겼다.

지난해 작고한 시인 이형기씨는 자신의 가상 유언장에는 무소유 한 마디 밖에 쓸 것이 없다고 미리 썼다.

서문을 쓴 이철호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은 "기업인들이 미리 유언장을 쓰는 일은 흔하지만 문인들의 유언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며 "솔직하게 쓴 유언장은 후학들의 연구는 물론이고 독자들이 문인의 삶을 되새겨보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jsk@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유언장

도종환.황금찬 외 지음, KD Books(케이디북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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