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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과 코끼리의 크기 차이를 뼈대를 중심으로 보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옛말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눈감고 만지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듯합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코끼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포유동물입니다. 특히 두꺼운 가죽과 강력한 힘으로 고대전투에서 말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동물 중에 하나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코끼리 몇 마리가 잠시 애완용(?)으로 길러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선물로 받은 것이라, 쉽게 버리지도 못하고 그 덩치와 밥값 때문에 무척 고생하며 길렀답니다.

심지어 그 큰 발로 사람을 살포시 밟아 살인죄로 저 멀리 바닷가 외로운 섬으로 유배까지 당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시대로 잠시 돌아가서 기구한 코끼리 살인사건에 얽힌 이야기로 잠시 들어가 볼까요?

코끼리, 선물로 조선에 건너오다

때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 음력 2월 22일, 일본의 국왕인 원의지(源義持)가 사신을 보내어 축하선물로 코끼리를 바쳤습니다. 물론 당시에 일본은 수시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서 그들의 토산물이나 특이한 동물들을 조선에 선물하기 바빴습니다.

그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일본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코끼리가 축하선물의 일원으로 조선 땅까지 출렁이는 바다를 넘어 건너왔던 것이지요. 아마도 당시 해양무역이 발전하던 때라 인도에서 몇 날을 배 멀미하며 일본까지 건너왔을 겁니다.

문제는 코끼리가 선물로 전해지면서부터 바로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 어마어마한 코끼리 밥값 때문이지요. 당시 조선에서는 사복시라는 곳에서 임금이 타는 말인 어승마나 금군(禁軍)들의 말을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선물 받은 코끼리는 사복시에서 마구간 몇 개 트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게 됩니다.

자, 이제 의식주 중에 옷은 그냥 가죽이 워낙에 두터우니 필요가 없고, 살 곳은 정해졌으니, 밥을 먹어야 하는데, 코끼리 이 녀석이 워낙 덩치가 커서 식탐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먹어치우는 양이 콩 4말에서 5말씩을 먹어 치우니 말 그대로 이것은 밥값 때문에 기둥뿌리가 뽑힐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을 년으로 환산하면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 정도이니 어느 정도인지 대충은 이해될 겁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편안한 일 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전 공조전서 이우(李瑀), 코끼리를 비웃다가 그만...

▲ 말발굽의 모습입니다. 말의 몸무게가 400~600kg 정도인데, 이 발에 밟히면 발등이 부서지는 고통이 따릅니다. 필자가 마상무예 문제로 말과 가까이 하기에 가끔 밟히는데 정말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물며 3-5톤이 나가는 코끼리가 밟으면, 그저 상상하기가 싫습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다음 해인 1412년 12월10일, 그 춥던 겨울날에 전 공조전서였던 이우(李瑀)는 기이하게 생긴 동물을 사복시에서 기른다기에 두툼히 옷 차려 입고 그곳으로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복시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나름대로 안락한 생을 보내고 있는 코끼리를 보고 이우가 말하기를 '내 살다가 살다가 저렇게 흉측하게 생긴 동물은 처음일세, 허허~'. 그리고 코끼리를 보며 '퇘퇘퇘~'하며 침을 뱉으며 코끼리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가뜩이나 날도 추워서 고향생각 간절한 코끼리가 이 꼴을 보고 성질이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그냥 한 방에 이우를 밟아버렸답니다.

만약 코끼리가 그날 사건을 진술했다면, 코끼리는 그냥 살포시 한번 눌러 주려고 했는데 그만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했겠지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코끼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은 야자수가 하늘을 뒤덮고, 차가운 것이라고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곳인데, 여기서는 엄동설한에 난방도 영 시원치 않아 가뜩이나 짜증이 온몸에 밀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기 보고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이런 식으로 놀려대면 그냥 한 주먹 아니 한 발 날리고 싶겠지요. 아무튼 이미 상황은 발생했고, 이후에...

코끼리, 전라도 섬으로 유배당하다

▲ ‘왕발톱 살인사건’의 용의자 코끼리의 유배지였던 남해바다의 섬을 지리산에서 바라봅니다. 저 멀리 여명 너머의 섬에서 코끼리는 수초만 뜯어 먹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당시 '코끼리 왕발톱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은 사람의 법으로 따진다면 코끼리가 왕발톱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그 또한 죽이는 것이 옳겠으나, 일본에서 바친 선물임을 감안하고 밥값이 장난이 아니게 소비되므로 저 멀리 전라도의 섬으로 코끼리를 유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결문을 쓰게 됩니다. 물론 당시 최고 결정권자였던 태종 또한 조금은 어이없는 살인사건 때문에 지긋이 웃으면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야, 코끼리는 저 멀리 전라도 섬으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보통 이 정도의 죄목이면 죄인들이 타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워낙 코끼리가 덩치가 크다 보니 걸어서 그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獐島)라는 섬으로 주변에 먹을 것이라곤 바다풀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섬에서 수초만 뜯어 먹고 살다보니 코끼리 또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래도 서울에서 살 때는 콩도 먹고 다른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는데, 여기에 온 이후로는 오로지 바닷물에 절은 풀이나 먹고 있으니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자 임금님은 코끼리를 불쌍히 여겨 유배를 풀고 다시 예전에 살던 사복시로 코끼리의 집을 옮겨주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다가...

코끼리 밥값에 지방관들 눈물 흘리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코끼리는 나름대로 '갱생의 의지'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워낙 기본 골격이 있는지라, 먹는 양은 좀처럼 줄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코끼리는 또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돌며 순번제로 이 고을 저 고을을 배회하게 됩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무슨 심봉사가 심청이 동냥젖 얻어 먹이는 것도 아니고, 코끼리 밥값문제로 지방관들이 조정에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덩치는 산만하고 조정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동물이라서 행여 밥이라도 안주면 자기 목 달아날까봐 잘 보살펴 주려고 했는데, 밥값이 지방관들의 허리를 휘게 하니 두 손 두발 들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는데, 우리의 불운한 코끼리 또 다시 재범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것은 충남 공주(公州)에서 코끼리를 돌보던 하인이 그만 또 다시 그 무시무시한 왕발톱에 채여서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시 귀향길에 오르는 불쌍한 코끼리

이렇게 코끼리는 1421년 3월 '코끼리 왕발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또 다시 외로운 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이렇게 떠나는 코끼리에게 당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하며 코끼리를 위로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그 코끼리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코끼리와 관련하여 1504년에 연산군은 코끼리 발을 상의원(尙衣院)에서 대내에 들이게 하되, 없으면 사서 들이게 하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코끼리 발을 어디다가 쓰려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혹시 코끼리 발이 또 다른 연쇄살인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몸철학과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 http://muye24ki.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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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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