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방송3사는 10일 월드컵 개막식부터 14일 새벽까지 열린 조별 예선 경기 14경기 가운데 11일 밤 10시에 있은 '네덜란드-세르비아' 경기를 제외한 13경기를 모두 동시중계했다. 각 방송사 홈페이지마다 월드컵 방송 광고가 눈길을 끈다.
마침내 '2006 독일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첫 경기 토고전이 끝났다. 시청에서, 광화문에서, 대학캠퍼스에서,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대구에서, 절에서, 교회에서 전국 방방곡곡을 뜨겁고 붉게 물들였던 6월 13일 밤이 지났다. 거리 곳곳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많은 사람들의 염원처럼 한국 대표팀은 토고를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냈고, 응원하던 사람들은 더 큰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어쩌면 직장에서, 거리에서 아직 한국대표팀의 승리를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들뜬 기분이 채 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마침 전국에 내리기 시작한 서늘한 빗방울이 어느 정도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듯 하다. 이참에 한 번 머리를 식히며 월드컵 열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특히 월드컵 열기를 앞장서 전파하고 있는, 어쩌면 그 열기를 '제조'해내고 있는 지상파 방송에 대해 냉철히 바라보자.

"너의 월드컵, 나의 열정을 이용하지 마라."

최근 이른바 '반(反) 월드컵'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학생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 붙이고 있는 스티커 문구다. 개인적으로 월드컵에 반대하지 않고, 굳이 '반 월드컵'이란 이름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지만 저 스티커의 문구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비록 축구마니아는 아니지만 사람들과 모여 땀 흘리며 공 차는 것 자체도 좋아하고, 수준높은 유럽 클럽축구 경기를 보는 것도 좋아한다. 호나우디뉴의 환상적인 드리블에 감탄을 자아내고, 한국 대표팀의 A매치 경기를 지켜보는 것 또한 적지 않게 즐긴다. 하지만 이번 2006년 월드컵 시작 전부터 거세게 불고 있는 '광풍'을 지켜보노라면 '차라리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좋겠다'는 감정이 불쑥불쑥 솟곤 했다.

물론 어제 축구 경기를 보면서 나의 '이성'은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감성'은 전혀 다르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전반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한국팀의 모습에 화를 내고, 후반에 골을 넣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또 역전까지 이르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옆사람과 손바닥을 맞췄던 것이다. 그럼에도 월드컵의 마지막 한 방울의 단물까지 쪽쪽 빨아먹으려는 미디어와 자본들의 광기어린 모습을 지켜보며 태클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절박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사의 월드컵 '광기'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13일 토고와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광장과 광화문을 가득메운 시민들. 대한민국 전체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다. 방송사들은 이 열기를 이용해 '한몫'잡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방송을 모니터하며 올해 초부터 방송들의 심상찮은 기운은 이미 감지했다. MBC가 뉴스데스크의 두 앵커를 독일 현지로 보내 새해 첫날부터 위성중계하는 모습을 보며 '별 짓을 다 한다' 싶으면서도 벌써 저러면 갈수록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역시 그 걱정은 현실로 나타나 D-100일이 되고, D-30일이 되고, 카운트다운에 돌입하면서 방송들의 광기는 절정으로 치닫더니 어제 토고와의 경기에서 마침내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그때 민언련에서는 수차례 논평과 보고서를 내고 "시청자들의 다양한 채널선택권을 보장하라"(3월 1일 앙골라의 평가전 동시중계 직후), "방송들은 '월드컵 과잉보도' 자제하라"(5월 10일 월드컵 D-30일 직후), "월드컵보도에 묻혀 지방선거가 실종되고 있다"(5.31 지방선거기간)고 주장해왔지만 방송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월드컵이 개막하고 한국팀이 경기하자 '오로지 월드컵만이 살 길'이라는 식으로 더욱 '광기'어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6월 13일에는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회원 3명이 지상파3사 앞에서 동시에 1인 시위까지 벌이며 "월드컵 시청 강요하는 MBC·KBS·SBS 규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적어도 한국팀의 경기가 마무리되기 전에는 방송사들의 태도가 바뀔 거라는 기대는 못하겠다.

이미 방송3사는 10일 월드컵 개막식부터 14일 새벽까지 열린 조별 예선 경기 14경기 가운데 11일 밤 10시에 있은 '네덜란드-세르비아' 경기를 제외한 13경기를 모두 동시중계했다. 그나마 '네덜란드-세르비아' 경기가 동시 중계되지 않은 이유는 MBC와 SBS가 10일 토요일 월드컵 중계로 불방한 주말 드라마를 11일 일요일에 몰아서 방송하면서 채널이 2개인 KBS만 중계를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KBS는 월드컵 64경기 모두를 생중계하겠다고 밝혔으며, MBC와 SBS도 모든 경기를 생중계 또는 녹화중계 하겠다는 방침이어서 방송3사가 대부분의 경기를 동시중계하는 일은 계속될 예정이고, 이 과정에서 정규편성 프로그램의 '불방' 사태도 이어질 전망이다.

지상파 3사의 중계 경쟁은 정규방송 시간을 넘어 새벽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방송사들은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를 아예 월드컵 경기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어 놓고 새벽까지 같은 경기를 동시중계 하고 있는데, 새벽 경기의 경우 한 채널당 시청률이 5%도 되지 않는다. 특히 새벽 4시 경기는 MBC, SBS, KBS를 모두 합쳐도 5%가 되지 않는 시청률을 보였다. 한마디로 '전파낭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코미디 같은 상황이 월드컵 폐막일인 7월 10일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새벽시간대 월드컵 방송 시청률 5% 이하

▲ MBC, SBS, KBS(위쪽부터) 방송 3사의 14일 방송편성표. 오후부터 새벽까지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월드컵과 관련되어 있다.
ⓒ MBC·SBS·KBS
더 큰 문제는 방송사들이 월드컵 경기 중계에만 열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각종 특집 프로그램, 정규 프로그램의 '월드컵 특집' 등을 제작 편성해 방송 전체를 '월드컵 방송'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 방송사의 메인뉴스프로그램도 넘치는 월드컵 보도로 '스포츠 뉴스'와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월드컵 개막일 직전부터 아예 주요 앵커와 상당수의 기자들은 '독일 출장중'이다.

또 거의 모든 오락프로그램은 '월드컵 특집'으로 편성돼 '붉은악마' 옷차림을 한 출연자들이 월드컵을 주제로 잡다한 이야기를 쏟아 내거나 게임을 했다. 뿐만 아니라 월드컵 관련 '특집'다큐까지 남발하고 있고 웬만한 교양 프로그램은 거의 월드컵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간판 시사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도 월드컵 띄우기에 이용당하고 있다. KBS는 이미 대표적인 고발프로그램인 <추적 60분>조차 '2006 월드컵 D-3, 대표팀 30일간의 기록'에서 시시콜콜한 대표팀의 일상을 쫓아다니는 보도를 내보냈으며, 이 과정에 대표팀 숙소에서 무리한 취재를 벌이다 선수단의 항의를 받는 등 물의를 빚기까지 했다.

이처럼 월드컵 특수를 통한 광고수익 극대화에 사활을 건 방송사들의 경쟁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월드컵 외의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고, 공공의 재산인 전파와 전력이 낭비되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현안들이 월드컵에 파묻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으며, 방송사 종사자들은 그들대로 소모적인 월드컵 중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방송사 내부에서 거센 항의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 우려를 너머 탄식이 절로 난다.

시사고발프로그램까지 월드컵 대표팀 좇아야 하나

물론 월드컵에 올인하고 있는 방송사들에게 나름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광고시장의 불황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고, 케이블 등 유료매체의 성장으로 지상파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광고시간을 팔아야 하는 지상파 방송들이 이판에 한 몫 단단히 챙겨보겠다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항변'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은 내팽개치고 상업적 이윤창출에만 악을 써대어서는 우리 사회는 물론 방송사 종사자들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번 월드컵이 끝나고 난 뒤 방송사들이 월드컵 기간 동안 보인 스스로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바꿀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지상파 방송사들은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시청자들로부터도 차츰차츰 멀어져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지금은 지상파3사가 '방송'을 대표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MBC든 KBS든 SBS든 그렇고 그런 방송으로 취급되어 케이블방송, IPTV, 와이브로, 위성방송의 수많은 채널 가운데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시민단체 활동가의 '극단적 착각'은 결코 아닐 것이다. 월드컵을 기준으로 제멋대로 편성을 짜맞추는 방송사들의 독단적인 횡포에 이미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강하게 분노하고 있다.

어제 토고전을 지켜보며 한국대표팀이 0-1로 뒤진 상황에서 전반이 종료됐을 때 옆사람과 농이지만 진지하게 "방송사 사장님들 속 타겠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월드컵을 마치 돈 내고 돈 먹는 '야바위판'으로 여기는 방송사들, 시청자를 광고단가 높여주는 '봉'으로만 여기는 방송사 사장님들, 정녕 한국이 탈락한 뒤에야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저(박진형)는 민언련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 

소모적 댓글('TV 안 보면 되잖아', '케이블TV나 보시지' 등)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 미리 밝혀둡니다.

저는 6월 19일 프랑스와의 경기, 24일 스위스와의 경기 중계를 모두 지상파를 통해서 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무료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상파방송을 통해서 앞으로도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경기를 계속 볼 것이고,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