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될 무렵 주일청국참사관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은 ‘조선책략’이라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책자는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수신사 김홍집에 의해 조선으로 반입되었다.

황준헌은 이 책자에서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 청나라와 굳건한 동맹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미국과도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주장은 사실상 일본의 설객이었던 청국인 황준헌이 청나라와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자국의 입장에서 쓴 책략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외교적 질서에 미쳐 눈을 뜨지 못한 친일각료 김홍집의 눈에는 이 주장이 마치 조선이 외교적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경전처럼 느껴졌고, 김홍집은 이 책략을 널리 유포함으로서 친일개화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토대로 삼으려 시도했지만 많은 유생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일제시대 친일파 경전 '조선책략' 떠올라

5월11일자 동아일보에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이 쓴 칼럼 ‘대통령의 세계일주’는 130여 년 전 황준헌의 '조선책략'의 재판을 보는 듯 참담하다.

이 칼럼에서 방형남 부국장이 주장하고자 하는 골자는 4강 외교의 중요성이었지만, 실제로 그의 속셈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그가 언급한 것은 4강 외교의 중요성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칼럼에서 방형남 부국장은 “미국과는 날이 갈수록 불협화음이 커지고 일본과는 등을 돌린 형국이다” 주장하며 뒤이어 “메르켈 신임 독일 총리가 취임 이후 두 번이나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이를 통하여 껄끄러웠던 미국과 독일의 외교관계에 훈풍이 돌기 시작했다”며 노무현 대통령이 메르켈의 대미외교를 벤치마킹 할 것을 시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미국과 일본을 ‘최고의 우방’으로 만든 원동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 외교력”이라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외교력에 찬사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형남 부국장은 “미국과의 불협화음이 커진다”고 진단했지만, 막상 한미간 불협화음의 원인제공자가 한미 양측에서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음으로 한미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마치 우리 정부에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과 일본이 등을 돌린 상황”은 일본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우경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으며, 최근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야스쿠니 신사참배, 과거사왜곡 등 한일 관계 경색의 근본적 책임이 일본의 무책임한 외교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무조건 양보는 굴욕이지 외교가 아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대북문제나 한반도 안보문제에서 우리 의견을 배제한 채 미국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며,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능멸하더라도 원만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방형남 부국장은 오늘날 부시의 외교정책이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서방국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고, 고이즈미의 외교전략 또한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로부터도 환영받고 있지를 못하다는 점을 외면함으로, 마치 그가 주장하는 외교 책략이 한국민의 입장에서 본 대한민국의 외교가 아닌 미국이나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대미. 대일 외교 책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외교에서 미국이나 일본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미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지침을 내리면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재 한미관계가 과거처럼 조용하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진통이라고 보는 것이 건강한 한미외교를 위해서 올바른 식견일 것이다.

대일 외교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진실한 반성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주권을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만한 한일관계를 위해 우리가 양보해야 한다면 이는 굴욕이지 외교가 아니다.

이 칼럼에서 방 부국장이 주장하는 것이 미국과 일본에 대한 굴욕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인터넷 한겨레에도 게제됩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와 음악 오디오 사진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다양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 억압은 절대 못참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