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아버지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는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가 손끝에 들려져 있고 툇마루 한 쪽에 등을 기대어 고단한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꼭 더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헐렁한 '난닝구'로 부끄러운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을 것 같다.

배우 장항선. 그보다 러닝셔츠의 담백함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47년생이니 어느덧 올해로 이순(耳順)의 세월을 건너왔다. 70년에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40여 년을 한결같이 배우로 살아온 그의 까칠한 턱수염에는 삶의 신산함이 자라고 있다.

보통의 아버지처럼 걸쭉한 사투리를 뱉어내며 드라마와 스크린을 꾸준히 지키던 그가 요즘 세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다름 아닌 영화 <왕의 남자>에서의 변신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는 연산군을 모시는 내시 김처선으로 분해 전혀 '내시'스럽지 않은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덕분에 처선은 '예쁜 남자' 이준기 이상으로 돋보이는 인물이 됐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남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배우 장항선의 연기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가래 끓는 목소리의 내시, 처음 반응은 '별로'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을 모시는 내시 김처선으로 열연한 배우 장항선.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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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남자>의 흥행 성공을 축하드린다. 이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그거야 뭐 감독님이 잘 만드신 거지(웃음). 만들 당시부터 '참 좋은 작품이구나'하는 느낌은 있었다. 3~4백만은 들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감독님께 했더니 좋아라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는…(웃음). 이 작품에 함께 했다는 것 자체가 배우로서 영광이다."

- 처선 역할을 맡았는데 내시 역은 처음이었나.
"그렇다. 사실 내시 역이 나에게 어울리겠는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흔히 내시라고 하면 가냘픈 목소리의 간신배 모습을 떠올리지 않는가? 망설였다. 그때 이준익 감독님이 김처선은 그런 역이 아니라며 함께 해 달라 했다. 그렇게 믿고 부르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일종의 도전 의식도 있었다."

- 김처선은 흔히 사극에서 보여주던 내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김처선의 성격을 잡을 때 어떤 스타일로 갈 것인지 고민했다. 극중 음색이 탁하지 않은가? 처음에 목이 아픈 듯 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자 감독님은 '이게 아닌데…'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내 분석을 설명하자 나중에는 쾌히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동의해 줬다. 몇 년간을 고생하며 다듬었던 작품인데 감독도 의도했던 뜻이 왜 없었겠나? 그럼에도 배우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준 것에 참으로 감사하다."

"가장 잘한 배우는 감우성, 모든 것을 건 듯했다"

 <왕의 남자>에서 장항선은 가냘픈 목소리 대신 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내시 처선을 탄생 시켰다.
ⓒ 이글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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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남자>의 어떤 점이 관객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나."우선 색감이 예쁘다. 종전의 사극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 나왔다. 촬영 중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서로 자화자찬했다(웃음). 더불어 '예쁜 남자' 이준기도 각광을 받았고…. 사실 작품을 하면서 서로의 느낌이 공유돼야 좋은 결과가 나오는데 그 모든 것이 잘 융화됐다. 무엇보다 이준익 감독의 공이 크다. 배우들은 사실 감독의 콘티에 따라 표현되는 것이다."

- 후배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건 어땠나.
"영화에서 가장 잘했던 건 감우성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줄타기를 연마했고 놀이꾼들의 톤도 많이 연습해 제대로 갖추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배우가 많지 않다. 모든 것을 걸었다고 보였다."

- <왕의 남자>에서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는가.
"무언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만족은 아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장항선에게서 못 보던 모습이 나오니까 감싸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 같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내 얼굴, 배우감 아니지만 정열과 끼는 넘친다"

- 70년에 KBS 공채로 연기에 입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출발은 원래 영화였다. 제대 후 지인의 소개로 영화 몇 편을 했다. 물론 얼굴은 안 나왔다(웃음). 그때도 선남선녀만이 배우를 할 수 있었으니까. 스스로 내 얼굴이 배우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열과 끼는 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우선 탤런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내가 주연을 하면 흥행이 될까? 안 된다. 나에게 맞는 역할이라면 단역이든 조연이든 상관없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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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탤런트 생활은 어땠나?"몇 번의 낙방 끝에 간신히 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이렇다 할 '배경'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방송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 물고 버텼다. 드라마 <전우>를 찍는데 당시만 해도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카투사 시절 운전병으로 복무해서 출연할 수 있었다. 영화는 1993년 윤삼육 감독의 <살어리랏다>가 사실상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 '영화배우' 장항선을 알린 것은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 아닌가.
"그렇다. 흥행엔 실패했지만 여러 젊은 PD나 영화인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칭찬했고 덕분에 늙은 포주를 연기한 나를 눈여겨 본 것 같다. 이후 <텔 미 썸딩>과 <반칙왕> 등의 영화를 하게 됐다. '장항선이란 사람이 저 자리에 있어도 되겠다'는 젊은 감독들의 열린 생각에 감사한다."

- 그간 형사 같이 다소 선 굵은 역할을 맡아왔다. 고정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예전 <형사 기동대>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실감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모래시계>에서도 땅콩을 까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텔 미 썸딩>의 장윤현 감독이 다시 한 번 해 달라고 하더라. 고민은 했지만 원하는 이가 있으면 해야 하는 게 배우라고 생각한다. 개의치 않는다."

장항선이 주연하면 흥행될까? 조연도 상관없다

- 요즘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가.
"김수로 같은 친구는 연기폭도 넓고 참 편하게 잘 한다. 그래야 관객도 편안하다. 그 외에도 좋은 배우들이 너무 많다. 내가 신인일 때 대선배들이 '인간이 먼저 되라'는 이야길 많이 했다. 당시 속으로 '언제 인간 아니었나?'하는 반항심도 있었는데 그 나이가 되니 옛 생각이 난다. 배역에 관계없이 모든 연기자에게 정을 나누는 배우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 <강력3반>에서 강력 3반의 육 반장으로 출연한 장항선. 나이든 형사는 그의 단골 배역이다.
ⓒ ㈜씨네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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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배우들에 비해 연륜 있는 연기자들이 덜 부각되는 현실이 아쉽진 않은가."아쉽지 않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해부해 봐야 하지 않을까(웃음). 그러나 흐름을 무시할 순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열정은 여타 원로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 장항선씨는 상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랬다. 방송에선 두 번 상을 받았는데 영화에선 후보로만 두 번 올랐다가 들러리로 돌아섰다. 상이라는 건… 좋은 거다. 하지만 상을 받아야만 연기자는 아니다. 그것 때문에 밥맛이 없거나 골치가 아프진 않다(웃음)."

- 때로는 멋진 주연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지.
"그런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맞는 역할이라면 단역이든 조연이든 상관없다. 내가 주연을 하면 흥행이 될까? 안 된다. ('왜요?'라는 반문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욕심이다. 단, <독 짓는 늙은이> 같은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다면 그런 영화에 출연하고픈 마음은 있다. 지금은 조연이든 주연이든 연기만 받쳐주면 관객들이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그만큼 관객 수준이 높아진 시대에 배우를 할 수 있어 한편 행복하다."

-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마디하면.
"관객이나 독자에게 사랑 받고 싶은 건 배우의 욕심이다. 건강하게 여러분들에게 배우 장항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변치 않고 사랑 주시기를 간곡히 바랄 뿐이다(웃음). 열심히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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