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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힘이나 무기 따위로 상대를 이기려 다투는 일'을 말합니다. 세상 도처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지만 주위에서 이런 싸움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취중 사소한 시비가 벌어지거나 접촉사고 등의 교통사고를 둘러싼 다툼 정도죠.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싸움 장면이 참 자주 나옵니다. 보통 검은 양복으로 복장을 통일한 조직폭력배들이 '연장'을 들고 피터지게 싸웁니다. 물론 한 대 맞고 두 바퀴 반 덤블링을 하면서 쓰러진다든지 맨주먹의 보스 한 명이 수십 명의 상대파 조직원들을 상대하는 등 과장된 측면이 많지만 말입니다.

흔히 '조폭'이라 하면 검은 복장과 함께 획일화된 머리 스타일과 역시 획일화된 덩치, 군사조직에 가까운 조직과 규율, 충성 등이 생각나는데요. 그렇다면 수백 년 전 조선시대에도 '조폭'이 있었을까요? 조폭 잡는 강력계 형사들은요?

물론 땅에서 힘차게 도약해 가볍게 담장을 넘거나 공중을 날아다니며 결투를 벌이는 모습은 상상력의 산물이겠죠. 그러나 조선시대 싸움꾼들의 역사 또한 우리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지금의 건달들과 그 모습이 똑같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조선시대의 검은 조직 '검계'

먼저 숙종 때의 기록을 보면 당시 좌의정 민정중이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는 말이 나옵니다.

"도하(都下)의 무뢰배(無賴輩)가 검계(劍契)를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습진(習陣)합니다. 여리(閭里)가 때문에 더욱 소요하여 장래 대처하기 어려운 걱정이 외구(外寇)보다 심할 듯하니, 포청(捕廳)을 시켜 정탐하여 잡아서 원배(遠配)하거나 효시(梟示)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숙종실록 10년 2월 12일)

▲ 검계들이 가지고 다녔던 창포검(菖蒲劒)과 유사한 형태의 조선시대 죽장도의 모습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긴 쇠꼬쟁이처럼 생긴 칼을 몰래 품속에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칼부림을 했습니다. 요즘 조폭의 '연장'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 경인미술관
'습진'이란 군사훈련을 말하는 것이고 '원배'는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이며 '효시'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처형방식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풀이하면 "서울 깡패들이 조직을 만들어서 싸움연습을 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져 있으니 포도청에 수사의뢰를 해서 처벌하자"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검계'가 바로 요즘 말로 하면 '조폭'입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칼을 든 무리' 정도 되겠네요.

기록을 보면, 이 말을 들은 숙종이 즉시 신하들에게 일러 각별히 살피게 했다고 합니다. 이후 일주일 후에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펼쳐져 10여 명의 검계원들이 체포됐습니다. 체포된 검계원들에 대해 민정중은 이렇게 보고하죠.

"포청(捕廳)에 갇힌 검계(劍契) 10여 인 가운데에서 가장 패악(悖惡)한 자는 칼로 살을 깎고 가슴을 베기까지 하여 흉악한 짓을 하는 것이 그지없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검거된 조폭 일원 몇 명이 칼로 자해를 시도하기까지 했다"는 내용입니다. 충성과 과시의 표시로 자해를 시도하는 조폭대원들이 그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들 검계에 대한 내용은 <연려실기술> 숙종조 기사에 좀 더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군영에서나 사용했던, 양쪽에 날이 있고 가운데에 '혈조(血漕)'가 나 있어 마치 창포잎 같은 모양의 '창포검(菖蒲劒)'을 휴대하고 한밤 중에 태평소를 불어 신호를 하는 등 수시로 모여 싸움연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민간인들도 갑옷 방패 화포 기치 등 군사관련 특수 물품을 제외하고 활과 화살, 창, 검, 도, 쇠뇌 등은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었던 점도 검계의 폭력성에 일조한 것이죠.

조폭 잡는 강력계 형사 장붕익

검계에 대한 기록은 영조를 거쳐 순조 때까지 이어지는데요. 영조 때 들어서 이들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포도대장 장붕익입니다. 검계는 장붕익이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리자 급격히 위축됩니다.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 언급한 이원순의 <화해휘편(華海彙編)>에도 포도대장 장붕익의 강력한 검계퇴치 전략이 나옵니다. 끔찍하게도 당시 검계들은 스스로 제 몸에 칼자국을 만들어 남들과 구별했는데 장붕익은 신체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은 모두 잡아 죽이는 철저한 처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조폭척결'에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이죠.

그러나 조직와해의 위협을 느낀 검계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장붕익에게 자객을 보내 그를 없애려는 시도까지 하게 되죠. 영조 9년 5월 12일 실록기사를 보면 장붕익이 영조에게 이렇게 보고한 내용이 나옵니다.

"잠결에 창 밖의 사람 그림자를 보고서 칼을 들고 나가니, 사람이 칼을 가지고 대청마루 위에 섰다가 이내 뛰어서 뜰 아래로 내려가므로 함께 칼날을 맞대고 교전(交戰)하여 외문(外門)까지 옮겨갔었는데 그 자가 몸을 솟구쳐 담에 뛰어 올라 달아났습니다."

조폭 소탕의 의지를 갖고 있는 요즘 시대의 강력계 형사나 검사들의 결의를 훨씬 뛰어넘는,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검계와의 대결을 펼친 것이죠.

몸에 칼자국 남겨 '나는 검계 조직원' 표시

실록에 따르면 영조 때 장붕익의 활약으로 소탕된 듯한 검계는 순조 무렵에 다시 출몰했습니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검계의 이름이 나오기에 이르러… 일종의 무뢰한 무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黨)을 이루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검계는 적어도 100년의 시간동안이나 역사 속에 자리한 셈입니다.

이들 검계는 다분히 공격적이어서 실제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재물과 인신을 약탈하는 범죄행위를 했습니다. 체포된 조직원들의 소지품 중에는 '양반을 살육할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 등의 내용이 적혀 있어 세상을 놀라게 했죠.

▲ 기산 김준근이 조선말에 그린 풍속화 중 죄인에게 북을 짊어지게 하고 거리를 돌게 하는 그림의 일부입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죄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형벌을 내렸습니다. 심지어 죄질이 나쁠 경우 효시(梟示)라 하여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걸어 놓기도 했습니다.
ⓒ 기산 풍속도첩
검계에 대한 기록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요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조폭이 떠오릅니다. 일단 결코 혼자 다니지 않고 떼로 몰려다니고 온 몸에 검계임을 상징하는 칼자국(일종의 문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을 남기고 싸움이 나면 일단 창포검을 비롯한 다양한 연장(?)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경찰에 검거되면 영화 <투캅스>에서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자해소동을 펼쳤다고 하니 너무나 닮은꼴 아닌가요.

조선시대 주먹쟁이 '왈짜'

검계 이외에도 '왈짜'라고 불리는 싸움꾼들이 있었습니다. 왈짜는 검계처럼 무리지어 이동하거나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주로 기방을 들락거리며 싸움질을 하고 다녔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주로 승자의 기록이고 가진 자들을 위한 기록이었기에 역사 사료를 통해 주먹을 썼던 이들 싸움꾼들의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풍속화를 비롯한 몇 가지 자료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기방난투>라는 그림을 보면 그 때의 상황이 쉽게 이해됩니다. 술과 여자가 연관된 기방을 보니 대형 클럽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영화 속 장면이 쉽게 떠오르는군요. 요즘과 흡사하게 자잘한 주먹다짐이 종종 일어나곤 했나 봅니다.

▲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중 '기방난투' 그림입니다. 기방에서 한판 싸움이 일어나고 그것을 제지하고 있는 모습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림입니다.
ⓒ 간송미술관
그림에서 보면 중앙에 힘깨나 쓰는 양반인 듯한 사람이 웃옷을 벗어젖히고 마치 '그래 한판 또 붙어 볼까?' 하며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몇 대 얻어터진 듯한 사람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붉은 옷을 입은 별감에게 제지당하고 있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은 조선시대 때 주로 기방을 운영하는 소위 '기둥서방'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별감은 왕명을 전달하거나 왕비전이나 동궁전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포도청이나 다른 관부에서 쉽게 이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기방은 주로 이들이 장악했습니다.

▲ '기방난투' 중 가장 처량해 보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쪼그려 앉아 자신을 팬 사람을 째려보며 친구의 갓을 줍고 있습니다. 옷에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맨 땅에 몇 번 굴렀던 모양입니다.
ⓒ 간송미술관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편 하단에 앉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보입니다. 그는 옷에 잔뜩 흙을 묻히고 '가해자'를 흘겨보며 떨어진 갓을 줍고 있습니다. 갓이 망가져 테두리와 봉우리 즉 양태와 대우가 떨어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하게 싸웠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 위쪽에는 기생어미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긴 장죽을 들고 태연히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요즘 시대로 따지면 어느 대형 룸살롱에서 일어날 법한 일 아닙니까.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싸움 잘했던 한량들이나 왈짜는 있었고 요즘처럼 사소한 시비에 작은 주먹다짐 정도는 종종 오갔겠죠. 그런데 기록에는 이런 왈짜들이 일종의 조직을 만들면 그것이 소위 '○○파'라고 불리는 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조선시대에도 조폭이 있었다'는 사실, 어떻습니까. 흥미로우신지요. 그런데 그 양상이 요즘 시대와 너무도 흡사하군요. 강력계 형사와 조폭집단의 대결, 술과 여자가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주먹다짐 등 여러 장면들이 말입니다. 신윤복의 <기방난투>가 오늘날 <넘버 3>나 <보스상륙작전>, <가문의 영광>, <패밀리>로 입체화 영상화된 것만 제외하곤 말이죠. 조폭의 역사 참 질기고 길군요.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김화진, <한국의 풍토와 인물>, 을유문화사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강명관,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허인욱,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무예풍속사>, 푸른역사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대명률 등 법전 
장소혜, <조선후기 풍속화 연구>, 한남대 석사학위논문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몸철학과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 http://muye24ki.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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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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