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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의 언행이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12월 들어 잇따라 북한은 "범죄정권"이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더니, 최근에는 북한의 위폐 문제에 대해 강경발언을 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버시바우 대사의 기고문이 <한겨레> 26일자에 게재되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 글에서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와 돈 세탁 등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계획이지만, 이 때문에 6자회담을 통한 북핵 해결 의지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진보적 성향의 언론매체에 기고한 일은 드문 일이다. 이는 큰 틀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전세계에 걸친 반미여론에 대응코자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를 강화해온 맥락과 닿아 있는 것이지만, 최근 버시바우 대사의 언행에 대한 한국의 비판적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응책의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농축 우라늄 의혹'과 닮은꼴

버시바우 대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이 달러화 위조지폐를 제조·유통하고 있다면, 이에 대해 미국이 우려를 표하고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제기 시점과 방식, 그리고 미국이 제시해온 증거를 종합해보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위폐 제조 및 유통과 관련해 몇가지 증거를 제시해왔다. 북한이 외부로부터 고성능 인쇄기와 특수 잉크를 수입했다는 것과 한국이 올 상반기 대량의 달러화 위폐를 압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제라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증거라기보다는 '정황 증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쇄기와 특수 잉크의 최종 사용처가 북한이고, 북한이 이것들을 이용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직 '의혹' 단계이다. 또한 한국 정부가 압수한 위조지폐가 북한제라는 것도 검증이 필요한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북한의 위폐 제조 및 유통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북한을 '범죄정권'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이는 미국 내 강경파들이 이 문제를 구실로 또다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논란은 북핵 문제의 재발 원인이 되었던 '고농축 우라늄' 문제와 흡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2002년 10월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2개월이 지나도록 부시 행정부는 이렇다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석연치 않은 행보는 당시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의 개선에 당황한 부시 행정부가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는 광범위한 의혹을 낳은 바 있다.

문제 '해결' 지향적인가?

북한의 위폐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10년이 넘은 해묵은 의혹을 왜 이 시점에 제기하고 있는지, 부시 행정부가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지, 문제가 있다면 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양자 협상을 거부하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북한의 위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근거로 북한을 '악마화'하고 6자회담 프로세스 및 남북관계와 북일관계 개선을 차단코자 하는 '숨은 의도'를 갖고 있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위폐 문제 등 일련의 대북 제재를 딕 체니 부통령과 로버트 조지프 국무부 차관 등 대북 강경파들이 주도하고 있고, 버시바우 대사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제기하면서 남북경협에 신중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고 있는 것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버시바우 대사는 북한의 위폐 문제와 6자회담은 별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6자회담은 북한의 핵 포기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해소를 두 축으로 하고 있고, 미국의 적대정책 청산에는 대북 경제제재 해소가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북한이 핵을 포기해도 미국이 다른 문제를 들어 적대정책 청산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면, 핵 포기의 동기는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미 양자 협상에 나서야

버시바우 대사가 강조한 것처럼,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의지가 확고하다면, 미국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자꾸 문제를 악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 해결 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는 회담의 형식에 대한 미국의 유연성이다. 북한은 이미 위폐 및 이에 대한 금융제재 문제를 양자 협상을 통해 풀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설명을 해줄 용의는 있지만, 협상은 없다"며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2차 북핵 문제 발단 초기에 "북한과 대화는 하겠지만 협상은 없다"고 말했던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미국이 이러한 비외교적인 자세를 고수할 경우 6자회담의 재개 및 성과 도출은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북한을 범죄국가 다루듯 할 것이 아니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미국은 관련 증거를 제시하고 북한은 이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위폐 제조 및 유통에 북한이 관여한 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인지, 아니면 일부 기관이나 요원들의 일탈 행위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뢰구축 조치의 일환으로 북한은 정부 차원에서 재발 방지 약속을 하고, 이에 대한 상응조치로 미국은 대북 금융제재를 해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부시 행정부가 위폐 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이 문제는 양측의 신뢰악화가 아니라 신뢰구축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버시바우 대사가 미국 강경파의 대변자가 아니라 합리적인 문제 해결의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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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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