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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무원록>(無寃錄)을 아십니까?

무원록이란 말 그대로 억울함이 없도록 해 주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무원록>은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라고 한다. 중국의 법의학책에 관심을 보일 이유가 있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조선시대부터 여러 차례 새롭게 주석을 달고 새롭게 간행하여 시체의 검시나 범죄 사건에 활용한 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세종 때 주석을 달아 <신주무원록>으로 편찬했고, 영조 대에 다시 이해하기 어렵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 보완하여 <증수무원록>으로 재편했다.

내가 <무원록>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KBS '역사스페셜'을 보면서였다. 정조 때 박여인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었다. 관(官)은 여러 차례 시체를 검시한 후, 여인이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하지만, 유족들이 의혹을 제기하자 또다시 여러 차례 검험을 하였고, 마침내 은폐되었던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범인을 잡게 되었다. 그 때 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바로 수사 지침서 <증수무원록>이었다.

나는 무원록의 기록들, 그것을 토대로 전개하는 조선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사과정, 사건처리 과정을 보면서 조선을 달리 보게 되었다. 조선은 낙후하고 전근대적인 나라가 아니라 이토록 훌륭한 제도가 있던 나라였다.

박여인은 서울의 유력한 세도가의 딸도 아닌, 지방의 평범한 양반가의 사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회는 이 사건을 3년이나 끌면서 한 점 의혹도 남지 않도록 낱낱이 밝혀냈다. 오늘날에도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의문사 사건이 남아있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조선 사회는 억울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과학적인 조선의 사건수사와 치밀한 처리과정에 대해서는 국사 교과서에서 크게 다루지 않으니 여전히 많은 이가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최근 드라마 <다모>와 영화 <혈의 누> 등에서 일면을 보여주었으나 나처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가 아니고서는 알기 쉽지 않을 만큼 그 비중은 작았다.

▲ 조선시대 검험기록
ⓒ KBS
추리다큐 '별순검'

지난 추석 파일럿 프로그램이라는 형식으로 '별순검'이 첫 방송되었다. 우연히 방송에 관한 기사를 접한 나는 그 바쁜 추석기간에 일하다 말고 틈을 내어 방송을 시청하였다. 탄탄한 이야기와 고증에 충실한 극의 전개를 지켜보면서 좋은 프로그램을 보게 되어 흐뭇했다. 거기에 더하여 반응이 좋았다며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주 챙겨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직업상 봐 두면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거리도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 편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6시라니! 그 시간이라면 벗을 만나 술잔이라도 기울이거나 시내 극장에서 영화라도 한 편 볼 시간이지 않은가! 하지만, 일찍 귀가하여 별순검을 보면서 주말을 건전하게 보내라고 하는 MBC측의 배려라고 좋게 해석하기로 했다.

'별순검'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별순검은 조선시대 검험(檢驗-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때 관리가 현장에 나가 시체를 검사하고 사망원인을 밝혀 檢案書를 작성하던 일) 과정과 사인(死因)을 과학적으로 규명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살인 사건이 나면 조선에서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 초검을 하고, 이웃 고을의 수령이 복검을 한다. 검시를 하는 각 관리들은 이전의 검시 과정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관리들이 검시를 할 때 지침서로 썼던 것이 이 <무원록>인데 '별순검'에서는 <무원록>의 내용에 의거하여 시체를 검시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시청자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죽은 사람의 입 안에 밥을 넣어 두었다가 닭에게 먹여보는 반계법을 통해 독살 여부를 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사망한 지 오래되어 독살을 판별하기 어려울 때는 시체의 입에 찹쌀로 지은 밥을 넣고 온몸의 구멍을 막은 후 초지게미로 몸을 덮어 시체에서 악취가 나는지, 입에 넣은 밥이 그렇게 하면 검게 변하는지로 독살 여부를 판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식초를 뿌려서 없애버린 혈흔을 찾아낸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추리다큐이기에 중간 중간 전문가가 출연하여 설명한다. 이 때문에 드라마 몰입에 방해된다는 의견도 많다고 하지만 설명을 해 주었기에 다시 한 번 주목하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한다.

추리다큐의 재미

MBC는 이 프로그램에 추리다큐라는 이름을 붙여 예능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 그래서 처음 MBC 홈페이지에 들어갔을 때는 이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찾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시청자들이 그렇게 느끼듯이 이것은 드라마다.

드라마기 때문에 드라마의 재미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위에 내가 제시한 놀라운 장면이 있다고 하여도, 조선시대 법의학 전공자만이 관심을 가질만할 뿐 대중적 재미가 없다면 이는 실패한 프로그램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별순검'은 수사의 진행 과정을 재미있게 보여주며 마지막에는 통쾌하게 범인을 잡아낸다. 살인 사건을 다루기에 가족들이 함께 보는 시간에는 어울리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살인 사건에 대한 과학적 수사 기법이 있고, 살인자는 반드시 잡힌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면이 있다

그리고 '별순검'은 신선한 소재를 다루었기에 더더욱 흥미가 가고 기대가 가는 작품이다. 작금의 한국 드라마가 구태의연한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기에 간신히 만든 한류가 곧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가 많다. '대장금'이 외국에서도 크게 성공하는 이유는 음식이라는 참신한 소재에 인생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별순검'은 이런 면에서 국내용은 물론 수출용으로도 결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우선 조선시대의 검험 기록을 토대로 만들었기에 이야기가 매우 다양하다. 또 앞으로 전개될 사율과 서은의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가 있고, 살인과 죽음을 보면서 제시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있다. 게다가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강웅비와 주책없는 듯하면서도 매력있는 조달환, 감칠맛 나는 조연 최법률 등이 만들어 주는 극의 재미도 훌륭하다.

흔히 이 작품을 미국의 수사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와 많이 비교한다. 나는 'CSI'를 시청한 적이 없어서 뭐라 평가할 수는 없으나, 동양의 방식과 사고로 합리적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 드라마도 미국 드라마에 못지않게 새로운 재미와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MBC는 이 드라마를 종영할 방침이라고 한다. 나는 이제껏 시청자의 드라마 시청권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더니 MBC는 어찌 이렇게 참신하고 작품성 있는 드라마의 가치를 모르는지 애석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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