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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5조약강요 100년' 심포지엄이 열린 추우오 대학 스루가다이 기념관
ⓒ 이경석

오는 11월 17일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을사늑약을 강요한지 어언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정치에 따라 사실상 내정마저 심각한 간섭을 받는 주권상실의 길을 걷게 된다.

때마침 지난 12일 도쿄에서는 '을사5조약 강요 100년'이란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을사늑약의 법적 해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새로운 사료가 제시되었다. 이 행사는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 주최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동경의 추우오(中央) 대학 스루가다이(駿河臺) 기념관에서 열렸다.

고종황제는 조약을 허가하고 주도했는가

▲ 강성은 교수
ⓒ 이경석
먼저 도쿄 조선대학교 강성은 교수는 '한국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 복명서'가 왜곡되었다며 그 '초안'을 공개했다. 지금까지 조약 합법성의 근거로 일본이 인용해온 수정안과 강 교수가 제시한 초안은 여러 곳이 달랐다. 특히 초안에 "한국 황제는 대체로 이번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으로"라고 되어있는 부분이 수정안에는 "대체로 이번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라고 되어있다. 즉, 고종은 소위 보호조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초안이 수정안에는 동의한 것처럼 왜곡되어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또 '오대신 상소문'에 대해서도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오대신 상소문'은 조약 체결 후 소위 을사오적이 조약체결의 경과를 고종황제에게 품의한 것이다. 조약의 적법성을 주장하는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교수나 하라다 다마키(原田環) 교수는 이 상소문을 들어 내각의 대신들은 조약에 반대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고종황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교섭할 것을 명하고 조약의 수정안에 주체적으로 찬의를 표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문서는 일반에 공개되기 전에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가 사전에 검열하였으며 하야시는 이를 "분식하여" 조약체결과정에 일제의 "압박이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각 신문에 싣게 하였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나아가 강 교수는 <고종실록>에 실린 한문원본과 <조선최근사>에 실려 일본인들이 인용하는 상소문 내용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미국공사가 목격한 조약의 강제성

▲ 아라이 신이치 명예교수
ⓒ 이경석
강 교수가 이처럼 고종황제의 협상지시와 재가여부에 초점을 맞춰 을사늑약의 적법성의 근거를 날카롭게 비판한데 비해 스루가다이(駿河臺) 대학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명예교수는 조약의 강제성을 입증하는 새로운 문서를 내놓았다. 즉,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각료들의 행동을 일본군이 제약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한미국공사가 보고서에 직접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보고서는 1905년 11월 20일자로 에드윈 모건 공사가 루트(Elihu 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것으로, 미국의 외교관과 본국과의 공식문서를 정리한 < Korean-American Relations > 제3권(1989년)에 실려 있다.

모건 공사는 교섭이 최종단계에 들어간 1905년 11월 17일 이른 저녁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주둔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회담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회담장은 미국 공사관과 낮은 담장을 끼고 불과 20여 미터 거리에 있고, 더구나 그 날은 청명한 날씨여서 회담장인 중명원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물론 실내의 모습까지는 보지 못했으나 일본의 헌병들이 회의실 베란다와 하나 밖에 없는 뒷문으로 이어진 통로를 샅샅이 감시하고 있는 것이 모두 보였다.

여기서 모건 공사는 조약체결 당일 "일본 헌병들은 표면상 이토 등의 경호를 위해서 배치되었다고 하나, 한국 황제에게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시키기 위해서도 이용되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 이미 이틀간에 걸쳐 서울시내에서 일본의 기마병과 보병들이 무력시위를 펼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각료들이 조약의 조인을 승인할 때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조약체결 장소 확인

아라이 교수는 이 보고서의 존재를 10여 년 전에 이미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보고서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사료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과 미국 공사관 사이에는 큰길이 가로놓여 있어 육안으로 보았다는 보고서의 정황이 실제의 구도와 합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작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해 일행과 함께 현장을 확인한 결과 당시 조약이 체결된 수옥헌은 덕수궁 안에 있지 않았으며 현재의 중명전이 그에 해당함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서울대학교 이태진 교수에게서 최종 확언을 얻었을 때 모건 공사의 이 보고서는 1급 사료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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