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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 오를 때마다 가을꽃이 피어나기를 고대하며 어떤 꽃들이 피어나는가 유심히 살펴봅니다. 육지에서는 이미 가을꽃들의 소식이 연이어 올라오지만, 육지에서는 이미 피었다 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꽃들조차 제주에서는 꽃 몽우리만 올라와 이곳의 가을이 더딤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요즘 제가 기다리는 꽃은 해국, 애기물매화, 감국, 꽃향유입니다. 그것들을 보고 나면 겨울에 피는 동백이나 비파나무의 꽃과 수선화의 행렬이 볼 만하겠군요. 그렇게 동백과 수선화가 한창일 무렵에 바람꽃이나 복수초 같은 것들이 그 바통을 이어 받을 것입니다.

▲ 애기물매화
ⓒ 김민수
꼬박 일년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주 길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오르면 만날까, 내일 오르면 만날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애기물매화는 여전히 꽃망울만 쑥쑥 올라올 뿐 쉽게 그 활짝 핀 얼굴을 보여주질 않습니다. 어디 숨어 있다가 올라오는 것인지, 제법 하얀 꽃망울들이 지천이다 싶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 둘 꽃 몽우리를 여는 애기물매화. 오랜 발품을 팔아 두어 개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략 일주일 또는 이주일 후면 지천에 물매화일 터이니 예쁜 것 골라서 사진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기대라는 것도 함께 자라기 마련이거든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겠지요. 분명 그랬습니다. 이전에 만나 담았던 물매화보다 더 예쁜 모습인데도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보고 싶었던 그 모습이 아니라고 실망을 했습니다.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것, 지치지 않을 정도의 기다림이라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임을 말입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다가 잊혀질 수도 있고,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미워질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 작은 들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조금 다르겠지요. 그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니까 이전처럼 무작정 들판을 헤매지는 않습니다. 때를 맞춰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죠. 그러나 가끔 때가 되었는데도 눈맞춤을 하지 못할 때에는 들꽃이라도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짝사랑이긴 하지만….

ⓒ 김민수
아내가 먼저 활짝 핀 애기물매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하기는 내가 더 많이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임자는 따로 있는 것인지 아내가 먼저보고 "여기 물매화 피었네!" 합니다.

아내가 "애기물매화"라는 닉네임을 갖고 싶다고 합니다. 이제부턴 "애기물매화"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아내의 닉네임 하나 만들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남편이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두고도 "○○이 엄마"라고 불려야 했던 아내, 언제 그 이름을 불러주었는지 아늑하기만 한 아내의 이름, 그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겠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일 애기물매화 언제 피나 기다리는 당신을 보니까 당신 애인은 꽃인가 보다 생각이 들데. 그래서 조금 샘이 나기도 했는데 실물을 보니까 정말 예쁘네. 그래서 평생지기 당신 애인인 내가 그 닉네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결혼 16년, 그 긴 세월 아내와 나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냈습니다. 살아가면서 닮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둘 다 돈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좋은 것 있으면 절대로 혼자서 독점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상처받고 후회할 때면 다른 사람들처럼 독하게 살자고 다짐을 하다가도 이내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냥 마음씨 나쁘지 않은 아줌마, 아저씨로 말입니다.

ⓒ 김민수
이제 막 시작된 애기물매화의 개화를 보면서 또다시 피어난 생명에 대해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더디게 시작하다 어느 날 갑자기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일지 기대가 됩니다. 실망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늘 기대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에게는 배신을 당해봤어도 자연에게서는 배신을 당한 적이 없으니 그 기다림이라는 것은 그들에 대한 믿음이겠지요.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너무 무지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 사랑하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자연이 병들면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도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털을 가진 짐승들이 자기 몸에 뭍은 불순물들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떠든 것처럼 땅과 바다도 인간들의 오염된 물질들로 인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몸을 떠는 것이 아닌지요. 지진과 해일 그 모든 것은 땅의 몸부림인 것이죠. 그 작은 몸부림에도 수많은 인간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그 자연적인 재앙조차도 약자들에게만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못된 관습들이 땅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요?

나도 자연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냥 보고 좋다고 지나치는 사람들 보다 조금 더 관심이 많은 정도입니다. 그래도 가끔씩 "목사가 외도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과의 인연이라 생각하고 저의 신앙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대해서 무지한 것도 죄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름 없는 들꽃'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이름이 다 불려질 때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외도가 아닌 정도를 가는 것이죠.

'애기물매화'라는 닉네임을 얻고는 즐거워하는 아내, 맨 처음에는 "목사가 꽃은 무슨 꽃이야"라고 하더니만 이젠 조금씩 내 편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래, 당신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하며 격려도 해 줍니다. 그런 아내, 오랜 세월 같이 산다는 것은 이렇게 닮아가고, 이해하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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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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