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의병장들의 유시
ⓒ 박도

의병정신선양회(회장 윤우 선생)에서 통문을 이 안흥 산골마을까지 보내왔다. 사연인즉, 제17차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2005. 9. 30~10.1)에 함께 가자는 초청의 말씀이었다. 지난해 의병전적지순례에 동참하여 경기도 연천 파주 일대의 왕산 의병장 전적지를 둘러보면서 배운 바도 많았던 터라 다른 선약도 있었지만 물리치고 영양가 없는 가을비가 질금질금 내리는데도 따라나섰다.

의병정신선양회는 전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 선생이 준비위원장으로 발족하여, 초대 송지영(전 KBS 이사장) 선생, 제2대 윤병석(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선생에 이어 제3대 윤우(광복회 부회장) 선생이 회장으로 의병정신을 드높이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고 계신다.

▲ 의병선양회 윤우 회장
ⓒ 박도
양재동 서초구청 앞에서 우리 일행 40명을 태운 버스가 출발하자 윤 회장은 인사 말씀을 겸하여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의의를 말씀하였다. 우리 일행은 대부분 의병장 후손 아니면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낯익은 분이 많았다.

"'의병(義兵)'이란 나라의 정규군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한 민간인 군인(일종의 게릴라)으로, 일본이 저지른 조선조 선조 임금 때 임진왜란 침략(1592~1598)과 근대 재침략(1894~1945) 때 우리 의병은 나라를 지키고 찾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의병은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백성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일어선 의로운 분들이었습니다. 당초부터 승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의병정신이 곧 민족정신이요, 민족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순례하는 호남지역은 의병이 임진왜란 때도 큰 역할을 다하였거니와 독립(국권회복) 운동 시기에도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일제가 강점하기 직전(1910. 8)까지 호남의병을 마지막 저항세력으로 보고, 이른바 '남한대토벌'이란 만행을 저지르고 나서야 그들이 말한 '합방'작업을 마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호남의병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3년 동안 110여 차례 교전하여 1909년에는 의병 수가 전국 의병의 절반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한말의 근대 의병은 독립운동의 효시로 무장투쟁의 선봉이었고, 훗날 독립군과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전해산 의병장의 <진중일기> 본문
ⓒ 박도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빗길에 부지런히 달렸으나 점심시간을 넘긴 뒤에야 첫 탐방지인 순천대학교에 이르렀다. 이곳 순천대학에 임시 소장 중인 전해산 의병장 유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순천대학에 이르자 이곳에서 합류키로 한 고광순 의병장 후손 고영복씨, 김태원 의병장 후손 김갑제(광주 무등일보 논설실장)씨와 부산 동아대학 홍순권 교수가 반겨 맞았다. 이분들의 안내로 순천대학교 임시 보관소(아직 박물관이 개관되지 않았음)에서 미공개 유품들을 특별히 관람할 수 있었다.

순천대학 박물관 김은영씨와 홍순권 교수, 그리고 전해산 의병장 손자 전영복(국회사무처)씨, 김갑제씨로부터 호남의병에 대한 개략적인 의병활동과 전해산 의병장 유품 뒷이야기를 들었다. 전해산 의병장 본명은 전기홍(全基泓)이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석용과 남원에서 창의하였다.

▲ <진중일기>, 표지는 새로 제책한 것이다.
ⓒ 박도
의병장에 추대된 전해산은 "왜놈은 우리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다. 임진년 피해가 그러하거늘 을미년 국모(명성황후)시해는 물론이요,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그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에 죽겠는가. 만일 하늘이 도우시고 조종이 돌아보시어 이 적을 소탕하는 날에는 우리는 마땅히 중흥의 일등공신이 될 것이다. 절대로 포학과 노략질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 회복을 위해서 싸우다 죽자"라고 맹세한 다음 항전의 길에 올랐다.

1908년 7월 불갑산에서, 같은 해 10월에는 광주 순창 담양 등지에서, 같은 해 11월에는 장성과 광주에서, 일군과 산악전을 전개하였다. 그 뒤 고향에 숨어 지내다가 영산포헌병대 통역 김아무개가 밀고하여 체포되어 광주감옥에서 갇혔다가 1910년 7월 32세에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대부분 의병장이 그러하였지만 전해산 의병장도 호적 없이 지냈다. 그러다 보니 후손들이 유품인들 제대로 간수할 수 있었으랴. 우리 일행을 위해 펼쳐놓은 병풍과 전해산 의병장의 <진중일기>, 유묵을 본 후손 전영복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뒤에야 그 사연을 물었더니, 8폭 병풍의 조선팔도 지도는 의병들의 작전지도인 것을 후세에 병풍으로 만든 것인바, 이 병풍이 집안사정으로 아무개 재벌에게 넘어간 것을, 전 광주 MBC 최승효 사장이 고가로 매입하여 소장하다가 그분이 순천대학에 기증케 되어 조상의 유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그 감격에 흘린 눈물이었다. 의병선양회 조세현 부회장과 동아대 홍 교수는 전해산 의병장이 남긴 <진중일기>와 유묵은 의병연구에 귀중한 사료라고 말하였다.

이런 귀중한 문헌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올 수 있었을까? 의병장 후손들의 말씀으로는 일제강점기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의 슬기로, 이 호남지방에는 예로부터 대나무 울타리였기에 대나무 속에다가 이 유묵을 감춰 뒀기에 혹독한 일제 강점기를 무사히 넘기고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 무렵 의병장들이 출정에 앞서 남긴 유시를 옮겨본다.

國家安危在頃刻 盡忠竭力義當事
義氣男兒何待亡 志濟蒼生不爲名

나라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다
힘을 써 충성을 다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의로운 남아가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릴쏘냐
백성을 구하고자하는 뜻은 이름이나 남기고자하는 일이 아니다

- 이항증(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증손) 역


▲ 전해산 의병장 유품을 의병선양회원들이 살펴보고 있다
ⓒ 박도
▲ 전해산 의병장 손자 전영복씨 내외가 할아버님 병풍과 유품을 살펴보고 있다
ⓒ 박도

덧붙이는 글 | (여기 올린 유품은 미공개로 이 기사는 3회 정도 이어갈 것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