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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한국어판을 낸 재일사학사 강덕상 교수
ⓒ 조성일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사람들이 “어~어~”하는 사이 밥상이 불쑥 솟아오르고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진도 7.9의 강진이 이렇게 간토(關東) 일대를 급습했다. 이와나미출판사가 간행한 <근대일본총합연표>에 따르면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만 9만1344명에 이르고, 전파 또는 소실 가옥이 46만4900가구에 달했다.

그러나 이 재앙은 또 다른 재앙을 위한 서곡에 불과했다. 6천명에서 1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관동대지진’이란 ‘역사 용어’로만 짧게 기억하고 있을 뿐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연재해’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진 이 사건의 한 가운데에는 “일본에서 일어났던 단순한 조선인 학살 이야기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해방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또 “지배-피지배라는 식민지 섭리가 일본 본토에서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란 의미가 똬리를 틀고 있단다.

이같은 주장은 최근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김동수·박수철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의 지은이인 재일사학자 강덕상(73·일본 시가현립대 명예교수) 교수에 의해서 제기됐다.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한국에 온 강덕상 교수를 출국 직전인 9월 23일 오전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사건 발생 82년 만에 한국에서 나온 첫 단행본

▲ 지진이 일어나자 곧바로 화재가 발생했다.
ⓒ 역사비평사
“이 책이 모국에서 ‘겨우’ 출간되게 되어 감회가 남다릅니다. 700만 명이나 되는 해외동포를 가진 우리 민족 입장에서 보면 해외동포들에게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관동대지진’의 전말을, 사건이 일어난 지 8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고국의 국민들에게 자세하게 알릴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 일본에서는 이미 1975년에 초판이 나왔었고, 초판에서 잘못되거나 부족한 부분을 수정 보완한 개정판이 2003년에 나왔던 점을 상기하면서 출간 소감을 말하는 강덕상 교수의 웃음에는 허허로움이 묻어있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에야 관동대지진에 대해 해명한다는 것이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니까 그랬다 치더라도 해방이 되면서 국가 차원의 해명 대상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묻혀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관동대지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그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 지금도 늦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사실을 말하려 해도 슬픔과 분노가 북받쳐 올라 말이 되지 않아 오로지 눈물만이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었다는 내 선친의 말씀이 자꾸 귓가에 맴돕니다. 우리가 타 민족에게 이유 없는 폭행을 당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권이 없고 독립이 없는 망국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강덕상 교수가 관동대지진을 바라보는 관점은 ▲ 이민족 권력 하에 인권을 박탈한 식민지 민족사의 통한(痛恨) ▲ 원한으로 얼룩진 재일동포의 수난사 ▲ 일본 제국주의의 차별과 전횡의 극치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인 희생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

그날 지진과 화재로 생명과 재산의 위험에 직면하여 우왕좌왕하는 일본인들에게 느닷없이 날아든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넣었다”는 괴소문은 불안한 일본인들을 더더욱 불안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고, 급기야 남(일본인)의 불행을 틈탄 비열한 놈들에 대한 분노는 조선인을 향한 증오로 모아졌다.

▲ 우물에 독을 풀었으니 주의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벽보
ⓒ 조성일
“단순하게 생각하면 혼란의 와중에 일어난 유감스런 일이라고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인이 지진을 이용하여 방화·폭행·약탈 등을 제멋대로 했다’는 유언비어가 어디서 생겨나 어느 곳으로부터 들끓게 되었는가도 모르는 사이에 계엄령이 시행되고 학살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강덕상 교수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직면해 있던 상황과 연결하여 이 의문을 풀어나간다. 당시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 조선의 3·1민족해방운동, 간도사건 등을 경험하며 식민지체제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일본의 국내 정세 역시 제국주의의 불안과 지배 심리를 자극했다. 1923년에는 일본 공산당이 성립되었고, 조선노동동맹회가 전국 조직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일본은 결국 1923년 3월 조선의열단에 대한 대탄압을 시작하고, 5월 노동절에는 조선인 사상범과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런 국내외 정세 속에서 일어난 관동대학살은 일본 제국주의가 진행하던 이데올로기 말살 정책과 식민지 탄압의 정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강 교수는 당시 일본 권력의 중추에 있던 인물들을 주목한다. 지진이 일어난 후 계엄령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한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키치(赤池濃)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었고,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 역시 아카이케 상사로서 함께 행동했던 당시 정무총감이었다. 여기에다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夫)를 포함한 이 트리오의 수기 등을 분석해보면 계엄령의 명분이 ‘조선인 폭동설’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희생은 ‘자연재앙’이 아니라 ‘인재’였다고 강덕상 교수는 말한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

사건이 일어난 지 8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일본과 한국 모두에게서 외면되어온 상황에 비추어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한국어판 출간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정부의 무관심도 무관심이려니와 우리 학계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방치해놓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지금까지 몇 편의 논문이 나왔을 뿐 단 한 권의 단행본도 없는 게 현실이다.

반면 일본은 1963년 관동대지진 4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인소란>이란 제목의 책이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서와 자료집, 사진집 등이 나왔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1952년 관동대지진 발발 35주년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조선인 학살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는 없었습니다. 금병동, 박경식(작고) 선생과 더불어 내가 나서 문제를 제기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지요.”

이때부터 관동대지진 관련 자료를 모아 연구하기 시작한 강 교수는 수많은 증언과 기억들을 통해 긴박하고 처절했던 학살의 진실들을 되살려놓는다.

아울러 강 교수는 이 책에서 식민지 지배에서부터 현재까지 일본 민중과 정부 모두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재일 조선인 차별의식의 깊은 뿌리까지 접근해나간다. 각종 자료를 통해 식민지 지배사상에 오염된 일본인들의 조선인의 차별관은 어느 정도였는지, 관헌의 파견과 조선인 적대정책은 어떻게 현실화 되었는지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주고엔 고주고센”을 발음해보라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일본 경찰은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으로 했다. 그래서 “주고엔 고주고센(十五円 五十五錢)을 발음해보라고 하여 제대로 못하면 학살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럼 왜 일본 당국은 조선인을 학살했을까?

강 교수는 지진 재앙의 책임이 황실이나 치안당국으로 전가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양이 필요했고, 또한 독립운동 등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조선의 저항이 날로 거세지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말살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가야하라 하쿠도가 그린 <동도대진재과안록>. 자경단이 조선인을 집단학살하는 장면.
ⓒ 역사비평사
“이 사건을 볼 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문제를 절대 비껴갈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조선인민의 해방투쟁과 연관 짓지 않고는 올바른 역사적 위치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 사건은 1910년 이후 식민지 지배와 그것을 보조했던 일본 민중이 ‘만만치 않은 적’ 조선인에게 느꼈던 공포심이 불러온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였으며, 불행한 한·일관계의 연장선에 놓인 필연적 귀결입니다.”

모든 책임을 조선인으로 돌리던 일본 당국은 9월 3일이 되자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가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며 ‘일부 불령선인(不逞鮮人, 후테이센진, 일본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항상 불평 불만을 품어 소요를 일으킬 염려가 있는 조선인이란 뜻)의 망동’이 있었는데, 그 배후에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는 또 다른 사건으로 전이시켰다. 일본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가 희생된 것도 이때다.

그러나 일본은 오스기 살해범에 대해서는 형식적이나마 책임을 명확히 했던 반면 조선인 살육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말 한 마디 한 적 없다.

“이것은 조선인 학살을 은폐시키고 합리화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의미 외에도 정부 당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겁니다.”

권력이 퍼뜨린 선전에 미혹되어 쳐다보지도 않고 살육에 가담하고 조선인에 대해서는 살인마저 허용되던 일본사회의 구조는 역사 법정에서 재판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하는 강 교수는 이런 말을 남기며 일본행 비행기를 타러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타민족을 압박하는 민족에게는 자민족의 자유도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이러한 만행을 허용한 일본 국민에게 쇼와(昭和)의 암울한 시대가 슬며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덕상은 누구인가

▲ 강덕상 교수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재일사학자 강덕상(73)은 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돈 벌러 갔던 아버지가 자리가 잡히자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던 것. 이후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를 다닐 때가지 강 교수는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런 그가 한국인으로 커밍아웃한 것은 메이지(明治)대학 대학원 시절. 같은 전공의 일본인 미야다 세스코(宮田節子) 등과 함께 ‘조선근대자료연구회’를 결성, 조선총독부 주요 간부의 육성녹음 녹취 연구회를 주도할 때 자신의 일본식 통명 ‘신노 사토루(神農智)’ 대신 ‘강덕상’이란 본명으로 불러달라고 하면서다.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500회에 걸친 조선총독부 경험자 육성 녹음 연구를 진행하면서 조선근현대사 연구에 매진한다.

그의 연구 성과는 <조선독립운동의 군상> <조선인 학도출진> <조선 독립운동의 혈사> 등의 저작물로 엮였고, 특히 6권에 달하는 <현대사 자료>는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 치고 그의 이 자료집을 보지 않은 사람을 없을 정도로 조선민족운동사 연구에 기초를 마련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다. 재일사학자라는 다소 낯선 그의 수식어에는 분단의 모순이 고스란히 배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자료를 인용하고도 정작 각주에 원자료의 출처와 함께 그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던 아이러니가 말해주듯 군사정권들의 재일교포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견 때문이었다. ‘빨갱이’라는 낙인. 강 교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운도 좋았다고 한다. 동생과 처가식구들이 소위 북송 때 북으로 갔음에도 용케도 공안사건에 엮이지 않았던 것.

1989년 재일교포로는 처음 공립대학 교수가 된 그는 역시 최초의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최신작 <여운형 평전>도 곧 우리말 변역본이 나올 예정이어서 흐믓하다고 말하는 강덕상 교수는 재일동포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재일한인역사자료관’이 오는 12월23일 개관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다고 했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역사비평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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