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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과 적묵당의 지붕 끝이 서로 끼워져 의지한 채 수백년을 보냈다.
ⓒ 이승열

▲ 싱싱하고 잘 마른 노란빛의 북어를 연상시켰던 목어가 살이 푸석거린다. 빨리 제 때깔을 찾았으면...
ⓒ 이승열

좋은 풍경을 보면 좋은 사람이 생각난다. 화암사 적묵당 마루에 하릴없이 사그라지던 빛이 내 안으로 스며들 때도 문득 그랬다. 요원들과 함께 이곳에 오고 싶었다. 이곳의 풍경, 빛, 공기, 느낌을 나누고 싶었음이 더 적당할 듯싶다.

위아래로 스무 살쯤 차이가 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정확히 서로의 나이를 모른다. 한두 번쯤 근데 몇 살이야? 하고 물은 적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도 모른다. 세상살이에 좀 서툴고 약간의 자폐 증상이 있어 모임 같은 것은 절대 못하는 사무실의 '왕따' 내지는 '자따'들이다.

일년에 딱 한번씩 길을 떠나는데 우린 그것을 여행이라 부르지 않고 '연수'라 부른다. 평생 공부만 했던 남편 마음 상할까봐 여행의 '여'자도 못 꺼냈던 N, 중3이나 되는 아들 밥 때문에 떠남을 꿈조차 꿔본 적이 없는 J, 여자들끼리의 여행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남편이 있는 S, 가족 없이 한번도 혼자서는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제주에서 날아온 K, 용감해 보이는 것은 껍데기뿐 다들 사정은 비슷하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화암사 절개'

▲ 세상을 사는 가장 강력한 무기 미모? 절개가 저토록 그윽한 눈길을 보내는 것을 처음 봤다.
ⓒ 이승열
작년 겨울 그 연수의 첫 번째 여행지가 화암사였다. 지난 가을 내가 느꼈던 화암사의 느낌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화암사로 향하는 오솔길에서 모두들 감격했다. 적당히 싸늘한 냉기, 딱 이틀뿐이지만 그래도 함께 여행을 떠났다는 뿌듯함. 온 몸으로 자연의 기운을, 나무의 기를 받아들여야 다시 일년을 버틸 힘이 축적된다. 이건 유희가 아니라 견디어낼 힘을 얻는 담금질의 시간이다.

화암사는 해체 보수공사 중이었다. 적묵당이 산산이 분해되어 대문이 폐쇄되고 우화루 옆 축대에 철난간을 걸쳐 그곳으로 드나들게 했다. 적묵당 마루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리란 계획은 틀어졌지만 그래도 모두들 만족했다. '극락전' 따로 떼어진 현판을 찾고 용머리를 찾으러 극락전 앞으로, 용꼬리를 찾으러 극락전 뒤로 바삐 좀 과장스럽게 움직였다.

화암사 '절개'가 아까부터 눈에 보이지 않더니 제일 어린 예쁜 후배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아니 이런 배신이? 화암사로 향하며 너의 그 절개, 지조, 영특함을 침 튀도록 이야기했건만 나만 거짓말쟁이가 돼 버렸다. 이젠 아예 드러눕고 애교를 부린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후배 옆에서 의젓하게 포즈를 취하며 아련한 눈길을 서로 맞춘다.

아직도 화암사 적묵당은 해체 중

올 여름 휴가를 몽땅 엄마와 함께 지냈다. 아이 낳고 산후조리 후 처음 갖는 긴 시간이었다. 원래는 세 자매가 배낭으로 티베트를 가려 했는데 아시아나 파업으로 표가 없어 일단 포기. 다시 패키지로 예약. 여행할 팔자가 아닌가 보다. 이번에는 엄마의 건강에 조금 이상징후가 보였다. 딸 셋 모두 여행을 포기하고 엄마와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아니었다.

양촌에 가서 쏘가리 매운탕을 먹으면서 가까이 다녀올 곳을 찾기로 했다. 고향집에 간 것처럼 반가이 맞는다. 아저씨가 직접 포획한 까치 구경도 하고 텃밭에서 딴 복숭아도 덤으로 받고 불명산 화암사로 향했다. 지금쯤은 보수 공사도 끝났을 터였다.

▲ 화암사 입구 오솔길. 산림욕이 따로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개울가에, 우리는 화암사에.
ⓒ 이승열
공사차량이 다녔던 길을 이용하면 화암사까지 갈 수 있건만 엄마는 절대 응하지 않는다. 왜 굳이 가지 말라는 길을 가냐고 그냥 아래 개울물에서 발 담그고 기다리겠단다. 개울가에 엄마, 아버지, 조카가 남고 딸 셋만 화암사로 향한다. 한낮의 태양이 이제 조금씩 사그라들고 숲도 제 색깔을 찾는 시간이다.

스님이 막 극락적 문에 자물통을 채우고 돌아서고 있었다. 대문을 지키고 서서 저녁 시간 길손을 차단하던 화암사 절개도 반갑게 꼬리를 흔든다. 적묵당 보수를 하며 화암사의 동선이 바뀌어버려 절개도 좀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해 극락전 처마 끝의 풍경이 더욱 선명하다.

스님 마음이 약해졌다. 되돌아와 극락전 열쇠를 가만히 내 놓는다. 조용히 합장하고 잠시 침잠의 시간을 갖고 스님의 화암사 이야기를 들었다. 화암사에 기거하면서 얼마나 화암사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가가 절절이 느껴졌다.

▲ 수백년을 견뎌온 신토불이 느티나무 기둥과 몇해전 교체한 수입산 기둥
ⓒ 이승열

▲ 화암사. 산신각도 장독대로 극락전도 적묵당도 모두 바위 위에 핀 꽃!
ⓒ 이승열
몇 해 전 보수 공사를 끝낸 극락전의 기둥을 비교했다. 수 백 년 전 절 앞 느티나무를 베어 세운 기둥이 지그재그로 나뭇결을 드러낸 채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얼마 전 해체한 후 바꾼 수입산 기둥은 결은 일직선이다. 작은 차이처럼 느껴지나 결이 곧게 갈라지면 힘이 없어 무거운 지붕을 견딜 힘이 없단다. 결이 지그재그로 갈라져야 지붕도 안정이 되고 기둥도 오래 가며 힘을 받는다고 했다.

기둥, 서까래, 대들보, 공포 모두 번호가 매겨진 채 무장 해제되어 끼워 맞혀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 위에 달랑 앉은 적묵당 뒤 산신각에 가니 화암사(花巖寺)의 의미가 확연히 다가온다.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산신각, 장독대뿐만이 아니었다. 극락전, 적묵당 모두 바위 위를 깎고 그 위에 세운 전각들이라 했다. 겹겹이 포개진 불명산 꽃 잎 속에 화암사가 꽃술이 되어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 했다.

▲ 우화루 아래 유생들의 흔적. 음주가무를 즐긴 자랑스런 무용담.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 이승열

▲ 아궁이 속 구들 입구의 나무. 수백년동안 조금씩 타 들어가고 있었다.
ⓒ 이승열

해체 중인 적묵당은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궁이에서 구들로 들어가는 입구의 나무가 송진에 절고 불의 열기에 타서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나무로 지은 집은 화재에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보이지 않는 구들 밑에서 수백년을 조금씩 타고 있던 나무가 어느 날 불씨가 되어 고스란히 수백 년을 잿더미로 만든다고 했다.

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우화루 현판 아래 조선시대 유생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생들을 대동하고 이곳에서 음주가무를 얼마나 질펀하게 즐겼나를 날짜까지 세세히 다 기록해 놓았다.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손으로. 우화루 옆 벽에는 현대판 유적이 가득하다. 나 여기 다녀갔노라고… 아무리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좀 서글프다.

▲ 골조만 앙상히 드러낸 해체된 적묵당. 보수하지 않으면 폭삭 사그러질 것 같이 위험했다.
ⓒ 이승열

▲ 지붕을 가렸다고는 하나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돼 있어 안타까웠다.
ⓒ 이승열
6개월 예정의 보수 공사가 끝났을 화암사를 상상하며 왔다고 말하자 스님이 허허 웃는다. '우리는 절대 손 못 대요. 국가지정 문화재라서.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작년 9월에 시작했는데 앞으로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앞서는 스님의 신발이 한여름인데 털신이다.

다음 번 화암사에 올 때는 여름 신발 한 켤레 사오자는 동생의 의견이다. 손을 저으신다. 텃밭에도 해체 중인 적묵당 안에도 뱀들이 놀러와 늘 발등을 덮는 신을 신어야 한단다. 전혀 덥지도 불편하지도 않단다. 화암사 절개의 눈이 짓물러 있다. 사람 나이로 치면 일흔에서 여든,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정 많은 노년이란다.

덧붙이는 글 | 언제까지 해체된 몰골로 세월을 견뎌내야 할지 스님도 전혀 모른답니다. 다시 화암사 적묵당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 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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