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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는 일제말기 '김일성 신화'를 낳게 된 사건으로 북쪽에서는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는 지난 98년 <동아일보> 방북대표단이 쓴 '원시림에 묻혀버린 북중국경' 등을 빼면 보천보 현장이 소개된 적이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김정기 서원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지난달 말 다녀온 보천보 현장답사기를 보내왔다. <편집자주>
▲ 보천보 전투지휘처 기념비.
ⓒ 김정기
지난달 말 나는 7박 8일간(7월 20~27일) 북녘을 답사했다. 백두산 연봉-하늘못(천지)-백두산 밀영-보천보-평양-보현사로 이어진 답사길 중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곳은 보천보였다. 보천보를 비롯한 이른바 '혁명 근거지'는 그동안 남쪽에 공개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보천보로 향하는 동안 1970년대 초 대학원에 다닐 때 운동권 선배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일성 장군이 독립투쟁한 것은 거짓이 아냐. 민족주의 진영이 기진맥진했던 1930년대에 김일성부대는 북만주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국내 진공에도 성공했어.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보천보 전투지."

당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남녘에서는 무장 독립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청산리 전투가 거론되지만 북녘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남녘 교과서에는 보천보 전투가 기재돼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북녘 교과서에는 청산리 전투에 대한 기술이 없다.

보천보는 백두산 아래에 있는 삼지연 '호텔'('초대소'에서 호텔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작지 않은 변화다)에서 남서쪽으로 47km 떨어져 있다. 7월 22일 백두산 밀림의 나무바다를 뚫고 1400~1500m 정도 되는 고원을 평지 달리듯 나아간 일행은 어느덧 압록강 지류인 보천보의 가림천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빨래하는 아낙들과 낚싯대를 드리운 할아버지들, 알몸으로 멱감는 아이들이 있었다. 차 안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뛰어들까.

▲ 보천보 전투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연한 주재소 정문.
ⓒ 이은정 서원대 국제교류팀장
남한에 청산리가 있다면, 북한엔 보천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인 1937년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넘어온 조선인민혁명군 90여명이 바로 이 강가 근처 밀림에 숨어들었다. 이들과 내응한 국내의 조국광복회원 80여명도 함께 잠복해 있었다.

지휘자는 제6사장이던 25세의 청년 김일성(1912~1994). 밀림에서 낮을 보내고 밤 10시에 작전을 개시한 이들은 먼저 전화선부터 끊은 뒤 주요 목표인 주재소를 공격했다.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경찰 3명과 조선인 경찰 2명은 모두 도망쳤고, 이들은 무기고에서 경기관총, 소총, 권총, 탄약을 노획했다.

이와 동시에 별동대는 농사시험장, 삼림보호소, 소방서,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습격·방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통학교도 연소됐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의원 집, 요리점, 잡화상, 주택에 침입하여 현금과 물자를 빼앗으면서 "조선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내라"고 했다고 한다.

▲ 보천보 전투의 주무대였던 망루(왼쪽)와 주재소(오른쪽).
ⓒ 김정기
이날 밤 피해자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중에서 살해된 이는 요리점 주인 한 사람 뿐이었다. 작전을 완료한 혁명군은 「한인조국광복회 10대 강령」50여장을 비롯, 「일본군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반일 대중에게 보내는 격문」등 수백 장의 '삐라'를 살포한 뒤 밤 11시경 압록강 건너 만주 장백산의 밀영으로 철수했다.

김일성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제74연대(함흥 주둔)는 6월30일 만주 장백현 간산봉에서 오히려 '괴멸적 타격'을 당했다. 일본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상이 조선 천지를 뒤흔든 보천보 전투사건의 간략한 전모다.

당시 보천보에는 조선인 1323명(280호), 일본인 50명(26호), 중국인 10명(2호) 등 1383명(308호)이 살고 있었다. '삐라'는 조선 주민을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환희와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또한 <동아일보>가 정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건을 연일 보도하면서 김일성의 이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인들에게 보천보 전투는 1936년 손기정(1912~2002)의 세계 제패에 이은 쾌보였다. 김일성의 이같은 행보는 바다 건너 미국에서 주미 외교위원회의 창설을 계획하면서 조선독립의 운명을 미국의 외교노선에 맡기고 있던 이승만과 대조적이었다.

보천보 전투는 조선민중 사이에서 '김일성 신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독립운동이 침체 분위기이던 때에 국내 진공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추격하는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신문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퍼지면서, 김일성은 신비화됐고 민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시기적 특성과 작전의 과감성, 언론 보도를 통한 사실 확산이 결합돼 나타난 결과였다.

아직도 수십발 총탄 자국 생생한 주재소

▲ 김일성 동상.
ⓒ 이은정
우리 일행은 7월 22일 오전 10시 마침내 보천보 광장에 도착했다. 날씨는 쾌청했다. 나는 번쩍번쩍 빛나는 동상을 지나 주재소 망루 쪽으로 뛰어갔다. 밑변 6m, 윗변 4m, 높이 5m의 사다리꼴 망루 한 면에 6개의 총안(銃眼)이 서늘해 보였다.

망루 안쪽으로 기와단층으로 지어진 왜식 목조건물인 주재소가 있었다. 주재소의 한 겹 바른 시멘트 벽면에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수십발의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령 백년이 넘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망루에서 시작된 돌담을 가른 채 건물을 덮고 있다.

남녘에서 온 나그네들은 동상과 전투 지휘소터를 거쳐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10여 평 남짓한 방 가운데에 책상 두 개가 T자로 놓여있었다. 방 둘레에는 2~3평 정도 되는 유치장 무기고, 쉼방, 세면장이 있으며 이 방은 망루와 지하통로로 연결돼 있다.

주재소에서 뻗어나간 폭 7m의 길을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민가와 상가, 우편소 터가 있고 반대편에는 면사무소, 민가, 보천보 혁명 박물관이 늘어서 있었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통 보이지 않는다. 텅 빈 길에서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은 단아한 보조원 '북녀'가 수줍은 미소를 살포시 띤 채 다소곳이 날 따른다. 괜히 걸음을 빨리했다.

▲ 북쪽 안내원이 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자료를 바탕으로 남쪽 답사단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김정기
일본인 요리집 앞 흰통돌 면에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었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천재적 전략가이신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37년 6월 4일 몸소 조직하신 력사적인 보천보전투 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인민의 피를 빨아먹던 이 일본놈 상점을 습격하고 많은 물자를 로획하여 인민에게 나누어주었다. 1977년 6월 4일."

우편소 맞은편 건물 2층에는 혁명박물관이 있었다. 전투참가 인물의 사진, 전투장면을 묘사한 그림,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각종 자료를 확대한 사진, 혁명군의 복장·무기·생활용품(멧돌 밥그릇 등) 등이 전시돼 있었다. 거기에는 김일성 '동지'가 물을 마셨던 흰 사발그릇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는 초기 사회주의 건설기의 소박하고 강건한 기풍과 리얼리티가 느껴졌고, 나는 그 속에 푹 빠질 수가 있었다. 인위적이며 가식에 넘쳐흐른 서양의 전쟁기념관이나 남북의 각종 기념관에 질려버린 내겐 차라리 감동이었다. 설명서나 그 흔한 소개책자 하나 없었던 것은 매우 아쉬웠지만 그같은 지적에 부끄러워 허리 굽히는 여관장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나왔다.

▲ 보천보 전투 당시 유일하게 희생된 일본인이 운영하던 요리점. 그 오른쪽 앞편에 붉은 글씨로 당시 상황이 기록된 비석이 있다.
ⓒ 김정기

▲ 보천보 전투에 참여한 조선인민혁명군이 사용했던 물품.
ⓒ 김정기
언제까지 역사적 사실 외면할 건가... 보천보·청산리 서로 가르쳐야

차에서 뒤돌아보니 멀리서도 김일성 동상이 잘 보인다. 그 동상은 지나치게 크고 빛나고 깨끗했다. 작고 소탈하고 어두운 듯 은은했으면 어떨까. 문득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광장에 서있는 몽골건국의 아버지 수헤바토르(1893~1923) 동상이 떠올랐다. 땅을 박차고 진군하는 말 위의 시골 아저씨, 바로 그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기존의 영웅상을 배반한 위대한 평범함이 있었다.

보천보 답사 이후 내내 생각해봤다. 우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보천보 전투가 실리고 저들 교과서에도 청산리 전투가 기재될 날이 언제 올까. 사실에 기초한 진실이 언제까지 이념대립으로 그 파편의 희생양이 되어야 할까. 이 진실을 외면한 우리가 일본 우익의 후소샤 교과서를 정면에서 논파할 수 있을까.

▲ 김정기 교수
보현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님 성불하십시오." 합장하는 내게 김일성 종합대학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는 젊은 보현사 주지가 답했다. "조국통일 빨리 이룩합시다." 이 또한 충격이었다.

의식의 동질성을 찾는 일은 아직도 멀었다 싶었다. 경제의 격차를 어느 정도 줄이고 우리도 천민 자본주의의 때를 벗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진리를 존중하고 의식의 동질성을 찾는 그날까지는 통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덧붙이는 글 | 한국사학자 김정기 교수는 서원대 총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지금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말 북쪽 조선사회과학자협회의 초청을 받아 서원대 미래창조연구소 및 연세대 국학원 소속 연구자 30여명과 함께 북녘을 답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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