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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6일 '진보성향'으로 알려진 연구소인 미국진보센터(CAP)가 "부시 행정부가 2005년 한국에 북한의 지하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미사일(벙커버스터)을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힌 데 이어 지난 5월 24일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이 "이라크에서 성능이 검증된 이 무기(벙커버스터)"를 미국이 "이미 2003년 이후 남한에 끌어들였다"(<연합뉴스> 5월 24일자)고 보도해 미국에 의한 한반도 핵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F-117A 스텔스 폭격기 자료사진
ⓒ 미 국방부
이러한 상황에 미국 국방부가 지난 5월 26일 F-117스텔스 전폭기 15대를 한국에 배치해 수개월간 훈련에 돌입한다고 밝혀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실 미국의 한반도 핵무력 배치의 역사는 미군 주둔의 역사 못지않게 기나긴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소한 서너 차례 이상 한반도에 핵사용을 심각하게 고려(졸고 <오마이뉴스> '북한 핵무장의 기원은 한국전쟁'-5월 20일자)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 아예 남한에 핵무기를 직접 배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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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째 진행 중인 미국의 한반도 핵 위협


1957년 남한에 핵 배치 시작

그 시작은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 공격 일보 직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핵 투하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했던 미국은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남한에 노골적으로 핵무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1957년 7월을 시작으로 핵탄두가 탑재된 지대지 미사일인 어네스트 존, 핵무기발사용 280밀리 포탄, 8인치 포탄, 일명 '스추케스 핵'이라 불리는 핵지뢰 등 모두 4종류가 배치됐으며 다음해 1월 29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남한에 대한 핵무기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1958년 3월 전폭기용 핵폭탄을 반입한 미 공군은 다음 해 핵 탑재 순항미사일인 마타도어 미사일 대대를 남한에 상주시킨다. 마타도어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1100km에 달해 북한 전 지역을 커버할 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까지 타격가능한 장거리 미사일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미국은 남한에 배치한 핵무기들을 업그레이드시킨다. 일본 동오닛포의 2000년 1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1961년 5월 일본 아오모리현 미사와 기지에서 발진한 F100D 전투폭격기 30기 중 6기가 군산에 도착했는데 이 폭격기들은 군산기지에서 신형수소폭탄 MK28을 탑재했다(김명철 저 <김정일의 한의 핵전략> 40쪽, 2005, 동북아).

이밖에도 미국은 1964년까지 지대지 능력을 겸비한 지대공핵미사일인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지미사일인 라크로세 잔토, 데비크로켓 핵바주카포 155밀리 핵폭탄 등을 국내에 반입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핵폭격 검토

한편 1968년 1월 미 전자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자, 미 존슨 행정부 내에서는 평양에 핵무기를 떨어뜨리자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생존 승무원 전원이 11개월간 구금돼 있는 동안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미국의 핵문제 전문가인 피터 헤이즈는 1991년 발표한 저서 <태평양의 화약고: 한국에서의 미국의 핵사용 딜레마>에서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남한의 비행장에 배치되어 상시 출동태세에 있던 미국의 모든 F4 팬텀전투기들은 오로지 핵무기만 탑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해 발버둥치던 미국은 1960년대 말 동아시아에서의 패퇴와 그로인한 경제위기, 국내외의 반전여론 등으로 동아시아 주요 기지의 지상군 병력을 단계적으로 감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빠진다.

주한미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9년 6만3천명이던 주한미군 병력이 1971년 6월에는 4만3천명으로 감축된 것이다. 하지만 주한미군 감축이 단지 '숫자놀음'일뿐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무력증강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전체병력만 줄었을 뿐, 주한미군의 핵전력강화가 이 조치의 핵심이었다.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가 불가피해지자, 미국은 핵무기 추가배치에 열을 올린다.

남한, 보복 핵공격 위기에 놓여

1970년 2월 14일부터 3일간 열린 미 상원 외교위 사이밍턴 분과위원회를 보도한 시사잡지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 배치한 미 핵전력의 핵심은 F4 팬텀용 제미니형 공대공미사일,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사정거리 21마일의 어네스트 존 원자포, 사정거리 10마일의 서전트 원자포, 핵지뢰 등 다섯 종류인 것으로 밝혀졌다(박세길 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2> 252쪽, 1989, 돌베개).

이들 무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미국의 노골적인 핵전쟁 음모가 드러난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1984년에 발표한 글 '한반도는 초강대국들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에서 미국의 핵전쟁 음모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는 한결같이 중단거리 실전용으로, 이는 미국의 실질적인 전쟁음모를 밝혀줄 뿐 아니라, 미국이 남한을 핵기지화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울러 밝혀주고 있다. 즉, 미국은 자기 영토 밖에서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핵기지에 대한 상대방의 보복공격으로부터 야기되는 피해를 남한에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또한 사정거리가 극히 짧은 각종 전술핵무기(사정거리가 34km인 어네스트 존, 16km에 불과한 서전트 원자포 등)의 배치는 북한이 미국의 (핵)공격대상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북한에 대한 핵공격은 말할 필요도 없이, 대소련 핵기지 역할까지 떠맡은 남한의 입장에서는 보복핵공격을 받아 절멸될 위기에 놓인 상황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미국은 1971년 6월 오키나와에 있던 전술핵무기 수백기 중 일부를 남한에 이전했다(박세길 위 책 252쪽). 이와 함께 미국은 제3세대 핵무기라 불리는 중성자탄두 탑재용 MGM-52 랜스미사일도 같은 해 배치했다.

주한미공군 전력 강화

같은 시기 미국은 핵무기의 증강과 함께 핵전력의 중추를 담당하는 주한미공군을 급속히 강화한다. 말뿐인 기만적 감축의 내막에는 고도화된 미국의 핵전쟁음모가 나날이 교묘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1970년 12월 21일 미사와 기지에 있던 미공군 제475전술전투비행단 F4 팬텀기부대가 1971년 6월까지 이전하며, 일본의 또 다른 공군기지의 EC121 와닝스터 정찰부대가 1971년 2월말까지 광주 기지로 이동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와 함께 마이클리스 주한미군사령관은 다음해 3월 4일 "한국 상공에서의 군수를 지원하기 위한 비행장 10개를 건설할 계획"임을 밝히며 주한미공군의 대대적 증강을 증명해 보였다(박세길 위 책 252쪽).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모든 주요 시설을 지하화한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개전 초기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방침을 이미 오래 전부터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 '공지전(空地戰 , AirLand Battle) 전략'이 개발되면서 선제 핵공격 요소가 이전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브루스 커밍스 미 노스웨스턴대 교수에 따르면, 북한의 견고한 지하시설에 핵무기 등을 사용하고 적의 영토를 향해 신속하고도 통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이 이 작전의 요체다(<김정일 코드> 161쪽, 2005, 따뜻한손).

공지전 개념을 펼치기에 증강된 주한미공군의 핵전력은 필수적이었다. 1975년 6월 제임스 슐레진저의 발언과 그의 후임으로 미 국방장관이 된 도널드 럼스펠드의 다음해 5월의 발언은 그 내용이 일치한다.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 이 발언은 가공할 핵무력을 남한 일대에 배치한 데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이렇듯 한국전쟁 기간 핵을 사용해 북한을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겨온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위협은 나날이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주한미군 감축을 빌미로 방대한 핵무력과 첨단공군력을 증강, 남한에 집결시킨 미국은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새로운 핵전쟁훈련인 팀스피리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동원 기자는 자주민보 기자입니다. 이 글은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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