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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릉
ⓒ 한성희
서오릉에서 가장 화려하고 당당한 능은 숙종 원비 인경왕후(1661~1680)의 익릉이다. 어째서 왕도 아닌 왕비의 단릉이 가장 화려한 것일까?

인경왕후 김씨는 고조부가 그 유명한 김장생이고 조부는 김익겸, 아버지는 서포 김만중과 형제인 김만기로 쟁쟁한 명문 집안이다.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돼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자손 없이 죽는다.

서오릉 중에서 공개 능 중에서 가장 먼저 들리는 익릉 소개를 가장 마지막으로 돌린 것은 남편인 명릉의 숙종을 먼저 소개해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익릉의 정자각 정면과 측면에 난데없이 기둥이 하나씩 더 붙은 호화판 정자각이 못마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5월 개방될 명릉의 출입구가 말끔히 단장을 끝내고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 한성희
지난번 명릉을 소개하자 기사를 읽은 문화재청고양시관리사무소에서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왔다. 비공개 왕릉인 명릉 출입구가 '교도소 문' 같다는 표현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교도소 문 같다는 표현은 명릉이 그 동안 비공개였던 이유를 들면서 느낀 대로 쓴 것인데 관리사무소 얘기를 들어보니 충격 받은 이유가 이해는 됐다.

올 5월부터 공개에 들어갈 명릉을 위해 관람객 출입구와 관람로를 따로 만들고 준비했는데 '교도소 문 같은 출입구'라 했으니 오해받을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실상 그 교도소 문 같은 입구로 관람객을 출입시킬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요즘 어느 유적지를 가든지 관람객을 맞는 출입구는 말끔하고 세련돼 역사유적지에 알맞은 입구로 손색이 없는데 설마 그런 문으로 관람객을 맞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교도소 문' 같다는 표현에 그 동안 서오릉과 서삼릉 비공개 능 취재를 위해 수차례 답사할 동안 성심껏 협조를 아끼지 않은 문화재청 고양시관리소에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친 셈 이라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독자들 입장에서도 충분히 오해 여지가 있는지라 현재는 개방을 하고 있지 않지만 관람객을 위한 출입구는 주차장 입구에 이미 단장을 마치고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재실 옆에는 문화재 보수를 위한 정비소가 있어서 그 동안 비공개였기에 보수반이 이 문을 사용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대두된 모화사상

모화사상이야 조선조를 통틀어 없던 적은 없지만 그중 가장 극심한 시대가 명이 멸망한 17세기이고 인조를 거쳐 현종대와 숙종대에 절정을 이룬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은 모화사상을 더욱 부추겼고 현종과 숙종대에는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우암 송시열은 지독한 숭명반청 사대주의자였고 이 때문에 효종의 북벌론에 찬성한다.

▲ 양 측면에 기둥을 하나 더 바치고 몸에 안맞는 어색한 옷을 입은 듯한 익릉 정자각.
ⓒ 한성희
조선의 역사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볼 수 있고 왕권이 막강했던 조선전기는 훈구파가 주도했어도 부국강병책이 뒤따라 나라가 안정됐지만 차츰 훈구파는 전형적인 기득권 전횡으로 나타난다.

조선은 당시 개혁파였던 신진사대부들이 주도해 세운 나라이고 그들이 사림의 주역이지만 세조 이후 형성됐던 척신들인 훈구파가 조선전기를 주도했고 임란과 병란 이후 사림이 주도권을 잡는다.

성리학이 찬란한 학문적인 철학으로 꽃피우는 것은 조선 중기지만 이때는 예학이 정치사상에서 물러서고 새로운 개혁사상이 대두되었어야 할 시기였다. 새로운 사상이라 할 북학파인 실학은 새로운 기득권이 되어 당파를 형성한 사림에 밀려나 조선이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를 놓쳤다.

▲ 숙종의 명릉 정자각은 기둥이 없는 전통 정자각이라 야무지고 안정돼 보인다.
ⓒ 한성희
효종이 죽고 나자, 송시열과 허목이 자의대비의 복상을 1년상을 입느냐, 3년상을 입느냐는 상복문제로 피 터지는 예송논쟁 벌여 주도권 싸움을 벌인 것은 예학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성리학이란 학문을 내세워 기득권 싸움을 했다는 증명밖에 되지 못한다.

기호학파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들은 이미 망한 명나라의 황제를 제사 지내는 만동묘라는 해괴한 사당까지 만든 숭명사대주의자였다. 이 만동묘는 당쟁의 온상지이며 민폐를 자행하던 대표적인 곳으로 훗날 대원군이 서원철폐 할 당시 제일 먼저 철퇴를 맞은 곳이다.

숙종대에 공작정치로 정권을 잡은 노론계열이 조선후기를 장악하고 조선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서는 친일매국노 반열에 들어 일제의 작위를 받은 대다수라고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밝힌다. 반면 독립운동에 나선 양반후예들은 남인과 공작정치를 반대했던 소론이었고 노론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니 숭명 사대주의로 나라를 망친 기득권의 역사가 이어 내려온 것이다.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사대주의 기득권들이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득세하는 세상이다.

▲ 익릉의 정자각은 양 측면에 기둥이 한칸씩 더 붙어있고 전면에도 기둥 한 칸이 더 있다.
ⓒ 한성희
현종은 예학을 내세운 서인과 남인에게 질질 끌려 다녔고 숙종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현종이 죽자 숙종이 세운 숭릉(崇陵)이란 능호와 정자각은 당시 모화사상이 판치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능호란 죽은 왕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인데 뭘 받들어 우러러본다는 뜻인지?

더구나 인경왕후는 김장생을 고조부로 두었고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이었으니 율곡 이이에서 김장생, 송시열로 내려오는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명문이 인경왕후 집안이다. 골수 사대주의자 송시열이 왕과 맞먹는 권력을 가지고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조성된 능이니 오죽할 것인가.

▲ 익릉의 정자각은 날개를 펼치고 뻐기는 듯한 당시의 사대주의자 모습을 보는 듯싶다.
ⓒ 한성희
정자각 양쪽 측면에 기둥을 세우고 5칸짜리 정자각을 만든 것은 현종의 숭릉이 처음이다. 그 다음이 인경왕후의 이곳 익릉(翼陵)이다. 5칸짜리 정자각은 허황된 흉내 내기의 표본 같아 왕비가 평복을 한 전래 정자각의 소박하고 우아한 깊은 품위가 보이지 않는다.

▲ 단정하면서도 깊은 품위가 배어나오는 덕종과 인수대비의 경릉 정자각이야말로 조선왕릉의 본래 정자각 모습이다.
ⓒ 한성희
예송논쟁의 주인공인 장렬왕후 자의대비(1624-1688)는 인조의 계비였고 숙종 때까지 무려 4대에 걸친 대비를 하다 역시 5칸짜리 휘황찬란한 정자각을 쓰는 휘릉(徽陵)의 주인공이 된다. 숭릉이나 익릉이나 휘릉이나 내 눈에는 조선 왕릉에 어울리지도 않은 이름을 억지로 갖다 붙인 사대주의 본보기인 능호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숙종은 예송논쟁으로 모화사상이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아버지 현종과 원비 인경왕후, 인조계비 장렬왕후의 세 능에 5칸짜리 정자각을 만들었으나, 단종과 단종비 송씨를 복위하면서 만든 능에는 간소할 것을 명하고 자신도 간소한 능을 고집해 다시 전통 정자각으로 되돌아갔다. 쓸데없이 돈을 많이 들이고 백성들 등골 빠지는 정자각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기도 한 모양이다.

숙종은 46년 동안이나 재위한 왕답게 능도 많이 조성했지만 초기의 능에는 전부 3칸 아닌 5칸짜리 정자각이 세웠고 왕권을 강화했던 이후엔 단종의 장릉, 단종비의 사릉, 자신의 명릉을 모두 간소한 능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명릉 보다 화려한 인경왕후의 익릉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남편보다 먼저 죽어야 남편인 왕이 당당한 능을 만들어 준다는 평범한 상식과, 병란 이후 조선을 휩쓸었던 모화사상의 그림자를 지금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그것이다.

익릉의 참도는 경사진 곳에 있어 중간 중간 계단을 놓았다. 정면도 기둥이 한 칸 더 있어 3칸이고, 홍살문조차 지아비 능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인경왕후의 능을 보면 당시의 권력 구조 판세가 그대로 나타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조선 왕릉을 보면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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