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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강은 관광의 출발지인 온정리에서 약 40여 분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포장의 좁은 길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입니다.

해금강코스는 먼저 해금강을 구경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삼일포로 이동하여 구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전의 일정으로 해금강과 삼일포 두 곳을 감상하기에는 빠듯해서, 여유 있게 구경하기 어렵다는 것이 다소 아쉬운 점입니다.

‘금강의 바다 풍경’이라고 하는 해금강은 말 그대로 기암괴석을 바다에 옮겨 놓은 듯 아름답다는 이야기와, ‘해금강을 보지 않고서는 금강의 미를 알지 못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삼일포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민중들의 기원이 서린 장소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두 곳 모두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 해금강 풍경
ⓒ 백유선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

본래 해금강은 군사분계선 근처부터 고성의 총석정에 이르는 약 60여km의 구간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약 2km정도의 거리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해금강의 맛만 보는 셈입니다.

해금강 관광은 도대체 얼마나 경치가 좋으면 ‘바다의 금강’이라 부를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볼 수 있는 해금강 경치의 중심은 해만물상이라고 불리는 향로봉을 중심으로 한 지역입니다.

향로봉은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는데, 여러 무리들을 버리고 혼자 바다에 빨려 들어가듯 서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바닷가 주변 수많은 작은 섬들과 해안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 해금강 전망대와 향로봉
ⓒ 백유선

▲ 해금강 풍경
ⓒ 백유선
금강산의 만물상 코스를 구경하지 못했으니 해만물상으로나마 만족해야 합니다. 향로봉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바위가 만들어낸 작은 금강산과 같은 오묘한 모습을 감상하며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기어이 참지 못하고 향로봉 주변에 호위하듯 서서 기이한 모양을 보여주는 바위에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보기도 합니다. ‘저건 촛대바위, 저건 고양이바위 아니 쥐? 어, 사람처럼도 생겼네.’ 안내해 주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도취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향로봉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바위틈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민족의 나무인 소나무입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의 절개와 지조가 있기에 금강의 바위가 더욱 빛난다는 생각은 이미 금강산에서도 가져본 적이 있지만, 향로봉의 소나무는 그런 느낌을 더 강조하는 듯 보입니다.

▲ 해금강의 기암괴석. 마치금강산을 조각해 놓은 듯합니다
ⓒ 백유선

▲ 해금강 향로봉의 소나무.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 백유선
아쉽게도 향로봉 북쪽은 북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금지되어서 인지 그쪽의 절경이 더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 너머에는 해금강의 꽃인 총석정이 있을 것입니다. 총석정은 관동 팔경에 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곳은 관광 허용지역이 아니어서 가볼 수가 없습니다.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보이지도 않습니다. 바위틈에 삐죽이 포신을 내밀고 있는 북한군의 대포가 마치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유명하다던 총석정을 보지 못하니 이곳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해금강의 경치 감상을 방해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해금강 관광은 수백 명의 관광객이 주차장을 출발하여 바닷가의 풍경을 구경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입니다. 마치 도심지를 걷는 듯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에 차분히 구경할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충분히 느낄 만한 시간도 부족하고요.

옛 사람들은 배를 띄워 해안의 절경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해금강은 제대로 보지 못한 셈입니다. 해금강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과연 금강산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지, 금강의 미를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제쯤이나 제대로 된 해금강 구경을 할 수 있게 될지….

여러 가지 아쉬움이 가슴 한쪽을 채운 채 차는 다음 목적지인 삼일포를 향해 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선의 놀이터 삼일포

이제 금강산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삼일포입니다. 삼일포는 호수의 경치로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또 관동팔경에 속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민중들의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원의 장소, 즉 매향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삼일포. 보이는 건물은 북한식당인 단풍관입니다.
ⓒ 백유선
삼일포 구경은 차에서 내린 후 곧바로 호숫가 쪽으로 내려가서 호수를 타고 돌다가 다시 봉래대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코스로 이루어졌습니다. 호숫가에서 삼일포가 준 첫 느낌은 금강산과는 또 달랐습니다.

금강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작은 봉우리가 굴곡진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조용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금강산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바위산의 위용으로 오밀조밀하면서도 웅장한 맛을 주었다면, 삼일포는 그것을 삭혀주기라도 하듯 조용하고 아늑한 모습입니다.

금강산이 산의 위용으로 오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면, 삼일포는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금강산과 서로 대비되면서도 잘 어울리는 쌍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삼일포가 있기에 금강산의 기암괴석이 더 빛나 보이고, 금강산이 있기에 삼일포의 포근함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얼어붙은 흰빛의 호수만으로도 이런 느낌인데, 물빛마저 푸르렀다면 그 느낌은 더 컸을 것입니다. 호수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에 어떤 왕이 하루 동안 놀러왔다가 3일을 놀다 가서 삼일포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여기에 온 왕이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록이나 정황으로 보아 이곳에 온 왕으로는 신라 진흥왕이 생각납니다. 진흥왕은 영토를 확장하며 함경도에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두 순수비를 세웠으니, 이곳을 통해 지나갔을 가능성이 가장 많습니다.

다른 한 명은 조선의 세조입니다. 세조는 금강산에 온 적이 있는 유일한 조선의 왕이니까요. 둘 중의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어떤 왕’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아무래도 기록이 분명한 세조보다는 진흥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완전한 추측일 뿐입니다.

조선 중엽의 문필가인 양사언이 공부를 하였다는 봉래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삼일포 경치의 최고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이곳을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삼일포에 오면 반드시 배를 띄웠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보는 호수의 경치가 더 으뜸이었다는 이야기겠지요.

봉래대에서는 북한 여성 안내원이 삼일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한꺼번에 몰려드는 많은 사람 때문인지 그녀의 설명은 짧고 간결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 봉래대에서 내려다본 삼일포. 북한 안내원의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백유선

사연을 간직한 바위섬

삼일포의 아름다운 경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호수에 떠 있는 섬들입니다.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고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바위섬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 중 사선정은 말 그대로 정자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옛날에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 등 네 명의 신선들이 삼일포에서 놀다간 것을 기념해 세운 정자라 합니다.

네 명의 신선은 화랑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살핀 융천사의 ‘혜성가’에 보면 화랑의 무리들이 금강산에 유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본 것입니다. 화랑들이 신선처럼 명산대첩에서 심신을 수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 작은 바위섬인 단서암은 말 그대로 붉은 글씨가 쓰여 있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술랑의 무리와 남석행’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술랑의 무리가 남석에 오다’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 삼일포의 사선정과 단서암
ⓒ 백유선

▲ 삼일포의 연화대
ⓒ 백유선
그런데 이곳을 찾아온 양반 관리들이 늘 이 글씨를 보려고 했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이들을 접대하느라 시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단서암을 짓이겨 물속에 처박는 바람에 지금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삼일포에 온 옛 사람들이 배를 띄워 구경하려고 했던 것이 단순히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매향비는 단서암의 꼭대기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매향비는 글자그대로 향을 묻고 세운 비석을 말합니다.

옛 사람들이 왜 향을 묻고 비를 세웠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륵의 출현을 기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륵은 말세가 되면 이 세상에 내려와 어려움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해 준다는, 기독교로 말하자면 메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민중들은 그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소망하며 향을 묻고, 그들의 소망을 담은 매향비를 세웠던 것이지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서 매향비가 발견된 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이미 삼국시대 이래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이 출현하기를 기원했습니다. 궁예와 같은 이는 이를 이용해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기도 했지요.

조선 후기가 되면 구원자 미륵은 마을로 내려와 동네 어귀의 못생긴 불상으로 조각되기도 합니다. 이 못생긴 미륵들은 말세에 나타날 구원자 미륵이라기보다는, 민중과 함께 하며 민중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작은 소망의 대상이었습니다.

▲ 삼일포의 장군대와 충성각. 북한에서 만든 것입니다
ⓒ 백유선
결국 삼일포는 그 유명한 경치로 인해 유람의 대상이 되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 지역 민중들의 바람과 소망을 담은 신비스런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이곳이 그런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북측 안내원의 설명에서도 매향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거리가 있는 사연 있는 장소를 좋아합니다. 그런 만큼 섬까지 가볼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짧은 시간의 삼일포 구경을 끝으로 아쉬운 금강산 기행을 마치면서, 이곳에 매향비를 세운 사람들의 심정으로 기원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져 달라고, 또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을 물리쳐 달라고….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열여섯 번째입니다.
이 내용은 글쓴이의 홈페이지('백유선의 고구려 유적답사기', http://noza.pe.kr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금강산의 '현지지도표식비'에 대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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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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