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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최부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표해록' 답사에 취재차 동행한 기자는 최부 일행 43명이 중국 절강성 영파시에 표착한 뒤 고초를 겪으며 심문장소인 임해시 도저소까지 끌려간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4박 5일 일정으로 답사에 나서면서 1500리 길, 제한된 시공간에서 스치듯 만나는 특별한 과거로 여행을 떠나본다. 5회에 걸쳐 금남 최부선생의 517년 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 필자 주-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

우리에게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못지 않은 기행문이 있다.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는 금남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이 바로 그것이다.

<표해록>에는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 상황과 지리, 민속, 언어, 문화, 조선과 명의 관계사 등 중국 문헌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귀중한 정보가 실려 있다. 중국 본토에서 표해록은 기행문학의 백미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에 번역본이 나왔고, 그나마 학계의 자료에 그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번 답사는 최부 일행이 14일 동안 표류한 뒤 가까스로 영파부 연해에 표착한 뒤 도저성에서 서점, 연산, 서흥을 거쳐 항주까지 도착하는 1500리 길의 발자취를 더듬어 조선 선비의 꼿꼿한 정신세계를 배우기 위해 기획됐다.

최부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전국에서 올라온 탐진 최씨 일족과 최부의 외손(外孫)인 나주(羅州) 나씨 문중, 그리고 방송대학, 나주시청 관계자 등 총 35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지난 17일 인천에 집결해 중국 항주로 날아갔다.

나주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 항주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4시였다. 최부 일행이 출항 이튿날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잃고 대양에서 14일간 표류한 뒤 표착해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항주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34일. 그러나 517년이 지난 지금은 11시간만에 항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절강성 항주주 전경
ⓒ 신광재
이번 답사는 최부 일행 43명이 영파부에 도착한 뒤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항주로 올라온 1500리길, 정확히 20일간의 고행의 길을 역으로 거슬러 항주에서 도저성까지 가는 4박5일간 일정으로 계획됐다. 옛 자취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는 최부 일행의 발자취를 더듬기에는 4박5일간 일정이 무리였지만 첫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달랐다.

최부 연구 1인자 북경대 갈진가 교수 답사팀 합류

120석 규모의 전세기가 찬바람을 가르며 기류를 뚫고 나가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심하게 기우뚱거리면서도 서산의 낙조를 뒤로 하고 항주로 향하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빗발을 쏟아내리면서 차가운 찬바람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도착과 함께 일행을 맞이한 이는 현지 가이드와 북경대 갈진가(葛振家) 교수였다. 갈 교수는 중국어 번역본을 내는 등 '표해록'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로 금남 최부 연구의 1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비가 내린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며 현지 가이드는 답사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답사팀이 도착한 항주는 절강성의 중심도시로 인구 630만명의 거대도시다.

절강성은 남한과 비슷한 면적이며 인구수 또한 470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성이다. 1년 365일 가운데 60일 정도 비가 내리는 도시로 이날도 이슬비가 답사팀을 맞이했다.

35명의 답사팀은 중국 시간으로 오후 3시 화려함과 전통이 숨쉬는 항주에 첫발을 내딛었다. 제주도에서 항주까지 가는데 최부 일행은 34일이 걸렸지만 답사팀은 인천에서 2시간만에 날아온 것이다. 4박 5일 일정으로 20일간의 최부 선생의 흔적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가기 위해 도착과 함께 곧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 금남 최부일행이 제주에서 표류된 뒤 영파부에 도착해 북경까지 올라간 행로.
답사에 앞서 금남 최부 선생의 '표해록'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여기서 추쇄경차관은 도망간 노비를 찾아 주인에게 되돌려 주던 일을 맡은 관리를 말한다.

43명의 일행은 출항 이틀째, 결국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잃고 대양을 표류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적을 만나 곡식을 뺏기고 매까지 맞은 일행은 표류 14일째, 가까스로 중국 저장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게 된다.

왜구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명 당국은 최부 일행을 왜구로 간주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것.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진 일행은 이제 군리(軍吏)의 인도를 받으며 항저우를 출발, 운하를 따라 베이징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명 황제를 알현한 일행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제주를 떠난 지 장작 6개월만에 지옥과 천당을 모두 경험한 뒤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양에서 성종을 알현한 최부는 표류부터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에서 겪고 들은 일을 일기체로 지어 바치라는 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표해록이다.

대양 표류와 중국 내륙 기행의 두 내용을 동시에 담아 다른 연행록들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표해록은 조선 선비의 꼿꼿한 정신세계를 일관되게 담고 있다. 성리학적 도학관으로 중무장한 선비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유교적 이치에 닿지 않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예컨대 배가 위태로우니 천신에 대한 기도를 올려보자는 일행의 요청을 단연코 거부하는가 하면 중국 연안에서 해적을 만났을 때도 관복으로 갈아입어 조선 관인의 어엿한 모습을 보이자는 요청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에 어긋난다는 게 그 이유.

또 베이징에 당도해 명 황제를 알현하는 과정에서도 상중이므로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을 수 없다고 버티며 명의 예부 측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탁상공론만 일삼는 선비는 아니었다. 소흥부를 지나다 수차를 처음 본 그는 논농사를 짓는 조선에 필요한 기술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그 원리를 배워서 가뭄이 잦은 당시 조선의 농업에 이용한 것.

표해록은 '중국의 문화(법)를 가지고 우리나라의 좁은 소견이나 짧은 지식을 변화시키는 뜻에서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등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모화 사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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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신문에서 역사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정치,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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