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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셀 오당 <농부와 산과의사>(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농부와 산부인과 의사. 언뜻 보면 이 두 개의 낱말은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따로 따로 놀아야 할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둘 다 소중한 생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농부는 늘 허름한 옷을 입고 고된 노동 속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씨를 뿌려 대자연의 생명을 키워내고, 산과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편안하게 일하는 것 같지만 하루에도 수십 명 씩 태어나는 사람의 생명을 보듬어 내지 아니한가.

농사와 출산. 농부와 산과의사. 그래. 어찌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만, 겉모습만으로 훑어 볼 때 농부는 블루칼라 계층이요, 산과의사는 화이트칼라 계층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자연의 생명을 다루는 농부의 속내나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산과의사의 속내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

"과거에 질병은 자연재앙으로 여겨졌다. 오늘날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구제역과 광우병이라는 두 가지 천벌이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강타한 때가 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질병들이 갑자기 산업영농에 대한 반대 여론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농업과 축산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으로 나아갈 길을 연 것이다. 구제역이 바로 마지막 일격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우리에게 과학적 지식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각성 사이에 얼마나 깊은 간격이 있는지를 깨달을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인류 전체가 일종의 '대각성'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갑작스런 각성을 가져오는 사건들은 예측할 수 없다. 시기가 결정적인 요인이다.

산업화 과정은 자연법칙을 압도하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었다. 적어도 그 굉장한 질병들이 발생한 운명의 날까지는 그랬다. 우리는 이제 전환점이 있는 농업을 지켜보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 동시에 우리는 산업적 출산 같은 산업화의 다른 측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15~16쪽, '마지막 일격' 몇 토막)

20년 넘게 프랑스 파리에서 가까운 국영병원 '피티비에'에서 외과 및 산과의사로 일한 미셀 오당(1930~)이 쓴 <농부와 산과의사>(녹색평론)가 나왔다. 김태언 교수(인제대 연문과)가 우리말로 옮긴 이 책은 자연과 사람, 농사와 출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늘 한 몸이라는 화두를 툭 던진다.

미셀 오당은 가정집 분위기와 거의 같은 분만실을 만들고, 수중분만을 도입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산부인과 의사다. 그는 지난 1990년부터 영국 런던에 '초기건강연구센터'를 창립, 사람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첫 돌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와 건강과 행동 사이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있다.

재생지로 묶은 이 책은 제1부 '마지막 일격'을 시작으로 제4부 '농업과 출산의 유사점들', 제6부 '그들을 기억하라', '제11부 '잠들기와 출산', 제13부 '카메라는 얼마나 위험한가' 등 모두 18부에 60편의 글이 빼곡히 실려 있다. 마치 사람 위주의 산업화에 자꾸만 시들어가는 뭇 생명들의 외마디 비명처럼.

산업적 출산은 또 잠재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둔 특정 유형의 산전관리를 의미한다. 모든 임산부들에게 임신의 여러 단계에서 수많은 검사들을 일상적으로 행한다. 단순한 생리적 적응 반응들을 질병으로 간주하여 기괴한 용어로 이름을 붙여 놓았다.

예를 들어 탄수화물 대사의 일시적 조정 작용을 '임신성 당뇨'라고 부른다. 태반이 잘 활동하고 있다는 신호인 혈액량의 증가를, 평소보다 혈액이 묽어졌고 따라서 헤모글로빈 등의 농도가 낮아졌다고 해서 빈혈로 본다. 반복된 산전검사들은 흔히 임신한 여성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심어주어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는 그것을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부른다. 그 때문에 우리의 자료은행을 탐색할 때 임신 중의 변화된 정서상태가 어떤 장기적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연구를 해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연구 중 여러 개는, 임신한 여성의 정서상태가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역시 사교성, 공격성 등,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능력임을 암시한다."
78~79쪽, '우리는 어떤 재앙을 기다리고 있는가' 몇 토막

글쓴이는 산업화된 농업과 산업화 된 출산은 곧 인간이 "수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신(神)을 흉내"내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 신의 흉내 뒤에 드리워지는 대자연의 무서운 재앙을 보지 못했다. 즉, 대기오염과 대자연의 질서파괴로 인한 삼라만상의 죽음 등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편리에 따라 산업화 된 농업은 살충제와 제초제를 비롯한 각종 합성화학물질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러한 "방사능보다 더 위험"한 화학물질의 남용은 농작물의 대량 생산은 가능케 했으나, 급기야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신체조직 속에 남아있는 화학물질에 노출" 되고 말았다.

태아 역시 화학물질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렇게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폭력적인 범죄와 자살, 자폐증 등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런 까닭에 "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성인의 질병과 그 사람이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 사이의 상호관계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궁극적인 최우선 과제는 농업을 변형시키거나 온실가스 방출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최우선적인 과제는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의 도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다른 인간-진정한 호모사피앤스(지금의 우리와 같은 종류의 신인, 지혜 있는 인간)는 자연지배의 한계가 명백해진 시점에서 새로운 생존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어머니 대지에 대한 존경이 어떻게 계발되는지 궁금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인류와 어머니 대지 사이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인류통일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그는 사랑의 에너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지구가 미래에 인간의 삶을 부양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필요와 이성, 그리고 과학적인 지식에 의해 촉발된 비유전적인 변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한 변이는 사랑의 과학화의 시대에 유토피아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능력이 어린 시절, 특히 출생 전후 시기의 경험들의 긴 연쇄를 통해 계발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는 방식은 일상적으로 방해를 받는 그 연쇄의 결정적 고리이다. 그것은 또 우리가 그것에 관해 행동을 할 수 있는 고리이기도 하다."
156~157쪽,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몇 토막

<녹색평론> 발행인이자 편집인 김종철은 '폭력의 문화를 넘어서'란 발문에서 "자연을 단순히 인간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마구잡이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이 지배하는 한, 오늘의 당면한 무수한 사회적ㆍ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이 내면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영영 회복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고 꼬집는다.

김종철은 제왕절개를 통한 출산이 산모에게 어떤 후유증을 남기는가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자연적 순리를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갈수록 편의주의와 기술을 앞세우는 문화 속에서 인간다운 삶의 존엄성과 그것의 토대인 영성(靈性)이 과연 온전히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농부와 산과의사>는 미셀 오당이 20년 넘게 산부인과 의사로 일한 실제 체험을 통해 출산의 산업화와 농업의 산업화에 대한 따끔한 벌침을 놓는다. 이 책은 산모가 임신기간 중 섭취한 먹을거리와 태아의 관계, 출산방법과 태아의 관계가 제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 속에서 빈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돋보기처럼 커다랗게 비춘다.

농부와 산과의사 - 개정판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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