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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자! 학교는 신문지국, 교사는 신문배달부.” 소년신문 학교 안 집단 구독을 놓고 터진 몇몇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외침이었다. 2002년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이 소년신문 강제구독 거부운동을 펼쳤지만 폐습은 여전한 상태다. 언론권력이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의 전당인 학교 안까지 뻗쳐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서울교육청 새 교육감 취임 직후 학교장 명의의 ‘가정통신문’이 일제히 발송되는 등 문제가 점점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년신문 학교 안 강제 구독의 폐해를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필자 주

'아국의 국화는 국화꽃입니다' 일본의 국화(國花)인 국화(菊花)가 우리나라 국화라고 보도한 <소년조선일보>(1938.6.26). 당시 <소년조선일보>는 <조선일보> '부록'으로 발행됐다.
ⓒ 소년조선일보

"조선일보 창간(1920. 3. 5). 굽히지 않고 일본에 항거해 온 조선일보는 글로써 민족의 정기를 드높였다. …조선일보를 발간, 독립에 대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날마다 수십만 부를 집단 배달해주는 <소년조선>은 자신의 모회사인 <조선일보>를 초등학생한테 이처럼 소개했다. 위 글귀는 이 신문이 2002년 3월 5일치 ‘오늘의 역사’ 난에 적어 놓은 내용. 2년이 흐른 올해 같은 날에도 <소년조선>은 어김없이 비슷한 내용을 썼다.

"조선일보가 1920년 오늘 창간됐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항일적인 논조로 창간 반년도 되지 않은 그 해 8월, 민간지 가운데 최초로 정간을 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지금까지 84년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자리잡아왔다."

<조선일보>가 굽힘 없이 일본에 항거했다?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신년호마다 천황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조선일보>가 <소년조선>에서는 '굽히지 않고 일제에 항거한 민족신문'으로 둔갑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거짓말은 곧바로 진실처럼 통한다. 신문의 독자가 순진한 '코흘리개' 아이들이기에 뼛속 깊이 그대로 박히기 때문이다.

최근 '친일과거사 청산' 논란이 한창이다.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답처럼 받아 읽은 아이들은 과연 어떤 판단을 할까.

"오늘날까지도 운보 김기창 화백이 친일을 했던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친일하지 않고서 이 사회에서 활동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김기창만 지조와 절개를 지켜서 민족 독립의 투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히려 김기창이 훗날 수많은 장애인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장애인 복지를 위해 앞장섰던 점은 어찌 보면 친일했던 부분을 덮고도 남는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듯 김기창이 한때 민족의 역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것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소년조선> 2002년 4월 1일치, '창의력 독서교실')


비록 글쓴이가 외부 필자이고 김기창 화백의 친일 문제를 직접 거론했다고는 하나 "그 당시에는 친일하지 않고서 이 사회에서 활동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친일했던 부분을 덮고도 남는 큰 업적"이라고 강조한 것은, 자라나는 어린 학생에게 친일 문제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이런 해괴한 내용은 <소년조선> 곳곳에서 나타난다. 올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사를 펼쳐보자. 3월 13일치 1면 사이트 톱 기사는 '노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을 전하면서 탄핵사유를 무척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대통령 탄핵은 나라 장래 위해 발의했다?

"두 야당(한나라당·민주당)이 지난 9일 공동 발의한 탄핵안은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수호해야 할 국가 원수로서의 본분을 잊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 운동을 계속해왔다'며 '이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판정과 경고 조치를 받았음에도 앞으로 특정 정당을 공개 지원하겠다고 해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초헌법적이고 초법적인 독재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그 사유를 밝혔다.

탄핵안은 또 '법치주의 부정 사태와 권력형 부정 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만들어 국민을 불행에 빠뜨린 노 대통령은 더 이상 나라를 운영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며 '이에 국회는 헌법을 지키고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탄핵 소추안을 발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기사 어느 곳에서도 국민 70%가 탄핵에 반대한다는 사실과 여당의 반대 목소리는 나와 있지 않다. 보도기사란 형식을 빌어 특정 정파(한나라당, 민주당)의 목소리만을 전달했다는 비판을 사기에 충분하다.

▲ <소년조선> 식 편협한 내용이 학습의 모습을 띠고 나타날 때 그 폐해는 더 심각해진다. 그림은 <소년조선> 2003년 5월 6일치 2면 NIE(신문활용교육) 기사.
ⓒ 소년조선사이트
이런 치우침은 미국과 부시 문제에서는 극에 달하는 느낌이다. 미국(부시)은 선이고 북한과 이라크는 악이라는 대립 구도가 기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더구나 이런 내용이 학습의 모습을 띠고 나타날 때 그 폐해는 더 심각해진다. <소년조선> 지난 해 5월 6일치 2면엔 NIE(신문활용교육) 학습문제가 나와 있다. 부시의 이라크 전 종전 연설을 다룬 <소년조선>의 같은 달 3일자 기사내용을 옮겨 놓고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질문을 던진다.

1. 미국은 이라크 공격을 시작한 지 며칠만에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나요?

2. 이라크에 파병하는 우리나라의 군인들은 주로 어떤 일에 참여하나요?

3. 이라크에 파병하는 국군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써봅시다.


이런 식의 학습문제 출제 방식에서는 이라크 전의 실체와 우리나라 군대 파견에 대한 성찰 기회는 박탈된다. 오로지 <소년조선>식 '의식화'만 남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이 신문은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가 집필하는 'Global NIE Quiz' 난을 통해 '파병 검토 국가도 반전 여론 눈치보기'(2003년 10월 9일치)와 같은 전쟁 반대 여론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형평성을 갖춘 극소수의 기사는 셀 수 없이 보도한 '정부 이라크 파병안 확정'(2003년 12월 18일치), '이라크 파병부대 이름 자이툰'(2004년 01월 27일치), '이라크 평화 재건 사단 창설'(2004년 2월 24일치), '자이툰부대, 친선 축구서 이라크 응원'(2004년 3월 25일치)과 같은 파병 홍보성 기사들에 파묻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철벽 요새, 북한은 '악의 축'이다?

오히려 2000년 들어 나온 기사들만 살펴봐도 미국과 북한 관련 보도에서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편향된 것들이 많이 발견된다.

“적 미사일은 공중에서 파괴…미국을 철벽 요새로”

2001년 3월 9일치 <소년조선> 2면 머릿기사 제목이다. NMD(국가 방어 미사일) 문제를 다룬 위 제목을 보고 미국 어린이신문이라 착각하면 안 된다. 그 내용은 다음처럼 이어진다.

▲ “적 미사일은 공중에서 파괴…미국을 철벽 요새로”. 2001년 3월 9일치 <소년조선> 2면 머릿기사에 실린 삽화.
ⓒ 소년조선PDF

"공화당 출신의 부시 대통령은 힘센 미국을 부르짖고 나왔어요. 힘이 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력한 군대와 무기를 가져야 하겠죠? ‘NMD’는 이런 목적에서 나온 거예요. …누구라도 미사일을 쏘면, 미사일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하늘에서 박살내겠다는 것이지요. 자기 나라를 지키겠다니 당연한 일이죠.”

자기 나라를 지키겠다니 당연한 일이라고? 백 번 양보해 그럴 수도 있는 소리라고 치자. 이런 포용력이라면 북한의 미사일 개발도 ‘자기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일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다.

<소년조선>은 2002년 2월 15일치 ‘북한어린이’란 고정란에서 다음처럼 외치고 있다.

"미국은 최근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선언하고 나서면서 테러 근절을 위해 더욱 힘을 쏟고 있다. …1990년대부터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불거지면서 미국은 더더욱 북한을 테러 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핵무기 운반 수단인 장거리 미사일이 개발되어 북한은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테러 국가가 된 것이다.”

미국 미사일은 자국을 지키겠다는 것이니 당연하고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니 테러국가가 되기에 당연하다는 논리다. 항상 <소년조선>의 눈은 북한이 하면 불륜이고 미국이 하면 로맨스로 보이는 것일까.

이 당시 NMD 개발과 ‘악의 축’ 발언은 우리 정부도 우려를 표명할 정도로 논란이 많은 문제였다. 순진무구한 아이들한테 이런 친미사대주의 잣대를 번득이는 신문이 우리나라 소년신문이라는 게 슬픈 일이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참여정부 들어서도 국가 행정기관인 초등학교가 이런 신문의 배달과 수금까지 떠맡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 십만여 명의 초등교사들은 오늘 아침에도 백만 명이 넘는 초등학생에게 이런 소년신문을 배달했다. 결국 잘 짜여진 각본에 따른 또 다른 형태의 '의식화 공동수업 교재'를 배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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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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