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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대법원 본관.
ⓒ 오마이뉴스 남소연

국가보안법의 존속과 폐지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를 따지자는게 아니다. 국보법을 지금 그대로 둘 것인지, 개정을 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 정치권 안팎에서 뜨거운 논쟁이 진행중에 있다. 아예 손대지말자는 수구적 주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개정과 폐지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여러 측면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문제로 남아있다.

지금 필자가 짚으려 하는 것은 본분을 망각한 이 나라 대법원의 오만과 월권이다. 대법원 1부는 한총련 학생들에 대한 상고심 판결을 통해, 최근 대두된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국보법의 존속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남북한 사이의 교류·협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 바로 북한의 반국가단체성이 사라졌다거나 국보법의 규범력이 상실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견해"라고 밝혔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두 피고인에 대한 판결이유에 국한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북한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없다거나 혹은 형법상의 내란죄나 간첩죄 등의 규정만으로 국가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국보법의 규범력을 소멸시키려는 등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며 국보법 폐지론을 직접 겨냥했다.

누구를 향한 목소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보법 폐지 권고의견이나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에서의 국보법 폐지론이 바로 그같은 근거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국가기관을 향한 비판이며, 입법부에 대한 비판이며,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상당수 국민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게 대법원이 할 일인가. 판사는 판결로써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재판부는 사건에 대한 판결의 영역을 넘어서서 국가보안법의 존속 필요성에 대한 정치적 훈시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자칫 나라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우국충정에서, 대법원 재판부는 그같은 발언에 나선 것일까. 다른 국가기관의 일에 간섭하는 월권이며 정치적 발언이라는 논란을 감수하면서라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에서 그같은 발언에 나선 것일까.

대법원도 사죄해야 할 '과거사' 없지 않다

▲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국보법에 대해서는 개정 의견을 가질 수도 있고, 폐지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 필자는 지금 상황에서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은 주장이라고 강변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부의 폐지반대론에 깔려있는 낡고 낡은 현실인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재판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가고 통일전선의 형성이 우려되는 상황임을 직시할 때, 체제수호를 위해 허용과 관용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이게 반북단체 성명서에서 사용할 논리이지, 어디 21세기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문에서 사용할 논리인가.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대법원이 작성했던 판결문을 다시 꺼내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세상에, 이념을 앞세운 운동권이 우리 사회에서 퇴조하고 사실상 소멸의 길을 걸은 것이 언제인데,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다니, 통일전선의 형성이 우려되고 있다니. 그건 명백한 사실왜곡이다. 흘러간 레퍼토리를 다시 꺼내든 이 나라의 대법원, 그 곳의 사실파악 능력은 고작 이 수준인가.

대법원이 사회내의 다양한 의견과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여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할 때, 대법원의 역할은 불신받게 되어있다. 과거 오랜 독재정권 시절, 독재와 민주 사이에서 '실정법'이라는 미명아래 독재권력 편들기로 일관했던 대법원을 국민들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벌써 잊은 것일까.

사실 대법원 재판부가 국가보안법의 정당성을 이렇게 소리높여 외칠 처지는 아니다. 과거 독재정권들이 국가보안법을 남용하여 수많은 용공조작사건을 만드는데 절차적 정당성을 뒷받침해준 것이 바로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사법부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래도 존중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말들을 안꺼내서 그렇지, 대법원이 반성하고 사죄해야 할 '과거사'가 어디 한두가지인가. 그 오랜 세월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때로는 용공의 누명까지 쓰고 법정에서 수도 없이 유죄를 선고받아온 역사를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 대법원이 할 일은,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에나 통했을 논리를 가지고 어설픈 훈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바로 그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무고한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일이다. 다른 기관들은 그래도 과거사 '고백'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하는데, 유독 대법원은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오욕의 과거가 자랑스럽기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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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 수술 이후 방송은 은퇴하고 글쓰고 동네 걷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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