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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산 화암사로 오르는 길은 고요하다. 그 고요 속 선정에 든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들이 제 몸을 조금씩 숲 안쪽으로 들여앉혀 만들어 낸 사잇길을 걸어오르노라면 문득 <한산시(寒山詩)> 한 구절이 마음을 스쳐간다.

“금일귀한산(今日歸寒山) / 침류겸세이(枕流兼洗耳)”
(내 오늘에야 비로소 한산에 들어 개울을 베고 귀를 씻노라)


‘귀를 씻는다’는 것은 아마도 ‘세심(洗心)’을 이름일 터. 나 또한 옛 사람 한산자(寒山子)를 흉내내어 맑은 물 몇 줌 떠올려 귀를 씻고 마음의 티끌을 씻어낸다. 내 번뇌의 무게는 과연 몇 근이나 가벼워졌을까.

계곡이 앞서는가 싶으면 어느 새 산길이 앞서고 산길이 앞서는가 싶으면 계곡이 따라잡는다. 산길이 점점 가팔라졌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 <죽장망혜>라는 단가 한 자락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강산 들어가니, 폭포도 장히 좋다. 여산이 여기로구나.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은 옛말로 들었더니, 의시은하하락구천(疑是銀河河落九天)은 과연 허언은 아니로구나.”

-대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조롱박을 찬 단출한 차림으로 천리강산을 들어가니 여산(중국의 산)이 바로 여기로구나. 삼천 척이나 되는 듯 나는 듯한 폭포가 곧장 쏟아져 내린다는 말을 (예전에는) 허사로 들었더니 (오늘 보니) 마치 저 높은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 철제 계단이 놓이기 전 옛길
ⓒ 안병기
▲ 새로 가설한 철제 계단
ⓒ 안병기

그러나, 갑자기 눈 앞에 흉물스런 붉은 철제 계단들이 출몰하고, 이 느닷없는 풍경의 반전 앞에서 내 도도한 감흥은 싸늘히 식어버린다. 1983년 폭포 위로 백 사십여 개가 넘는 철제 계단이 놓임으로써 화암사를 찾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일주문이나 천왕문, 금강문이 따로 없는 화엄사는 절에 이르는 험난한 진입로가 일종의 산문의 구실을 감당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 계단이 생김으로써 절에 대한 접근성은 훨씬 용이해졌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경건함과 성스러움은 스러져 버렸다.

더구나 이 붉은 철제 계단 아래 감춰진 폭포들이야말로 화암사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절경이다. 이제 수십 길 폭포가 보여주는 장엄한 풍경은 철제 계단 아래 숨어버려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옆 계곡을 거슬러 올라 벼랑 끝으로 나 있는 옛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그렇게 힘들다거나 별로 위태로운 길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철제 계단을 놓은 것일까.

철제 계단을 오르고 아주 작은 섶다리를 건너가면 “불명산 화암사”라는 현판을 단 2층 누각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서방정토의 입구로서의 누각들은 누하(樓下) 진입을 허용하지만 이 우화루라는 누각은 누하를 아예 석축으로 쌓고 막아버려 진입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그러므로 부처가 계시는 불국토인 절집으로 들어가려면 우화루 옆 문간채에 난 작은 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 화암사 들어가는 문간채 대문의 문미와 문턱
ⓒ 안병기

문턱과 문미가 둥글게 휘어진 이 작은 대문의 아름다움은 밖에서 보다 안에서 밖으로 내다볼 때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동그란 문턱이 턱을 괴고 있기 편해서일까. 화암사에 적을 둔 견공 한 마리는 틈만 나면 문턱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어느 시인은 그 견공의 귀가 하도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다 듣는다고 설레발을 쳤지만 내가 보기엔 그 견공도 산중 생활이 적적하고 무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누렁이는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절집을 찾는 객(客)이 나타나면 “얼씨구, 절씨구, 칠씨구, 팔씨구” 제 흥에 겨워서 객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리운 세간의 냄새를 킁킁거린다.

▲ 화암사 극락전
ⓒ 안병기

화암사는 극락전과 우화루가 북과 남으로 마주보고 적묵당과 불명당이 동과 서를 마주보고 있는 ‘ㅁ’ 자형으로 당우를 배치한 아담한 절집이다. 보물 613호인 화암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이다. 잡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 볼 때 가운데 기둥의 높이가 제일 낮고 추녀 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귀솟음 형식을 취했다. 이는 건물 양쪽 어깨가 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목재의 부족으로 지붕을 많이 빼지 못하게 되자 건물 측면을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기 위해 풍판(風板)이 생겨났는데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화암사 극락전에도 역시 지붕 양쪽 박공 밑에 역시 풍판을 댔다. 좁은 건축공간을 활용하다보니 적묵당의 지붕 끝이 극락전의 풍판을 뚫고 들어오게 되었다.

▲ 전면 하앙. 용두각으로 투각되었다.
ⓒ 안병기
▲ 후면 하앙. 단순하게 삼각형으로 처리되었다.
ⓒ 안병기

화암사 극락전은 또한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앙(下昻)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다. 하앙이란 밖으로 돌출한 출목도리를 받을 수 있게 서까래 방향으로 거는 부재의 일종으로서 처마를 길게 빼기 위한 공포 형식이다.

밖으로 뻗어나온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어 건물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유난히 강우량이 많은 호남 지역에 적합했던 건축양식이다. 전면의 하앙은 용머리 모양으로 투각한 화려한 장식인데 반해 후면의 하앙은 간결한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어 놓았다.

▲ 화암사 보궁형 닫집
ⓒ 안병기

극락전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여 좌협시에 관세음보살 우협시에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그 위에는 보궁형 닫집이 얹었다. 세 겹으로 된 지붕의 서까래와 공포가 치밀하게 짜여져 있으며 구름 속의 용두와 동자상이 닫집 주위를 날고 있어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 부처를 그려넣은 극락전 공포 아래에 있는 불창
ⓒ 안병기

다포계 건축물에는 창방 위 주두 사이로 마치 사람이 앉아 있는 듯한 형태의 빈 공간이 있는데 이른바 공포 벽화불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메우고 벽화를 그리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건축용어로는 불창(佛窓)이라 부른다.

본래는 개방돼있던 이 창을 막아 부처님을 그려넣는 불창의 변형된 형태인데 아직도 불창을 막지 않은 옛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부석사 안양루의 불창은 해가 지고 불이 켜지면 마치 여러 분의 부처님이 좌정해 앉아 있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극락전 오른쪽에는 철영재(綴英齋)라는 작은 당우가 있다. 이 생소한 이름의 당우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꽃부리를 깁는다‘는 뜻인데 화암사 공양주 보살에게 그 뜻을 물으니 ’입을 삼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풍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 하다. 철영재 뒤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깍지똥만한 작은 부도 1기가 홀로 서 있는데 앙증맞기 그지없다.

▲ 적묵당 쪽서 본 우화루
ⓒ 안병기

사찰의 누는 그곳에서 설법을 행한다는 점에선 법당과 같은 성격을 지닌 당우이다. 우화루(보물662호)는 고승대덕이 그 위에 올라 설하는 심히 깊고 미묘한 부처님의 법을 들고 중생들의 환희에 벅차 있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우화루는 밖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안에서 보면 1층이다. 우화루의 마루바닥과 안 마당의 지면을 일치시켜 좁은 마당을 넓게 보이도록 배치했다. 시각적으로 마당을 넓게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두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 넓게 쓰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화루 안 오른쪽에는 목어가 걸려있다. 형태상으로 순천 선암사의 것과 약간 닮아있는 화암사 목어(木魚)는 단청이 완전히 벗겨진 탓인지 소박하다 못해 약간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과 불명당은 승방이자 요사채이다. 적묵당은 ‘ㄷ’자형으로 된 건축인데 앞마당 쪽으로는 툇마루가 깔려 있고 뒷마당 쪽으로는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 옆에 자리한 산신각은 정말 ‘성냥갑’만 하다.

▲ 극락전 풍판을 뚫고 들어간 적묵당 지붕
ⓒ 안병기

이 적묵당의 양쪽 지붕 끝은 우화루의 풍판과 극락전의 풍판을 뚫고 들어가 기생하고 있다. 넉넉하지 못한 공간이 건물간의 상생을 유도한 것이다. 극락전과 우화루는 적묵당에게 자신의 풍판을 뚫고 들어오도록 곁을 내준다.

이 화암사의 당우들은 그 건축 자체로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곁들여 사랑과 관용의 원리까지 보여 주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아닐 수 없다.

여름 한낮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절 마당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채 모든 움직임을 그친 네모난 공간이 적막했다. 비어있는 것은 적막하다. 우리 시대에서 적막 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소리에 중독되어 살았던가. 자동차 경적, 휴대폰 벨 소리, 그리고 소음 보다 더 지독한 음악이라는 이름의 잡음 속에 묻혀 살면서 차라리 적막을 갈구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할 수 있다면 적막, 그 니르바나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화암사 절 마당에 머물고 싶었다.

화암사를 빠져나와 서쪽으로 쌓여진 축대를 끼고 돌아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올라갔다. 15C에 쓰여진 화암사 중창비가 거기 있었다. 거의 글자를 읽기 어려울 만큼 풍화되어 버린 비문을 들여다본다. 중창을 마친 이듬해(1441)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왜 선조 5년(1572)에 비를 세웠을까.

산길을 자박자박 걸어 내려간다. 철제 계단이 아닌 옛 산길을 더듬어서. 한참을 내려가다 우연히 부도 2기가 서 있는 화암사 부도밭을 만난다. 부도 하나는 깨어진 것을 붙여놓았다. 화암사는 이래저래 곡절이 많은 절이다.



人間世(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열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詩 <화암사(花巖寺), 내 사랑> 전문(全文)


안도현 詩 <화암사, 내 사랑>을 기억해내며 발길을 서두른다. 이 숲을 벗어나면 다시 소음과 잡음으로 가득찬 사바진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에 지칠 때마다 난 화암사의 적막을 못내 그리워하리라.

화암사 찾아가는 길

▲ 오정숙 선생이 거처하는 동초각
버스로 가는 길-전주역 앞에서 화암사행 버스 이용

승용차로 가는길-전주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봉동→고산→경천→용복 주유소에서 구계마을을 거쳐 4.5km 가면 된다.

화암사를 나와서 17번 국도를 타고 대둔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운주면 산복리 주암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마을 안 원적골 <동초각>에 들르면 판소리 명창 오정숙 선생의 사는 모습과 함께 제자들 가르치는 소리 한자락도 얻어 들을 수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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