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박상규

깊은 강원도 산골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지금 제가 머물고 있는 민박집 옆에는 맑은 동강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고, 전교생이 12명밖에 없는 작은 분교도 있답니다.

어제 저녁 분교 선생님을 비롯한 마을 아저씨들과 소주 몇 잔 기울이고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더니, 이렇게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금쯤 일어나셨겠지요.

어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도록 지금처럼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날 어머니 곁에 있어야 도리인줄 알면서도 이렇게 낯선 길 위에 있습니다.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잠시 발길을 돌려 집에 다녀올까 생각해봤지만 그냥 말았답니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낯선 길을 걷는 게 이제야 겨우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집에 다녀오면 저는 다시 흔들릴 것만 같습니다.

ⓒ 박상규

그 흔들림에 대한 두려움이 저의 발길을 잡았네요. 낯선 길을 걷는 이 막내아들 어머니에게 드릴 특별한 게 없습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맑고 아름다운 동강을 따라서 걸었답니다.

소리 없이 흐르면서 바다로 가는 먼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강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습니다. 막내아들이 두 다리로 꿋꿋이 걸으며 찍은 그 동강의 모습을 어머니에게 선물합니다.

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 어머니는 많이 말리셨지요. 왜 자꾸 떠도느냐고, 왜 그리 오랫동안 나가느냐고, 다녀오면 무슨 일을 할 거냐고. 한숨을 섞어가며 당신의 막내아들을 말리고 또 말리셨지요.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마음 알지만 저는 이렇게 낯선 길 위에 서야만 했습니다. 세상으로 열린 길은 언제나 저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저에게 길을 나서게 합니다.

ⓒ 박상규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이 여행이 끝이 나면 다시는 길을 떠나지 않겠다고, 남들처럼 안정적으로 살겠다는 그 쉬운 약속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막내아들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살길 바라는 소박한 어머니의 바람을, 아마도 저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배신할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방랑기가 많았고 그래서 많이 고생하셨다고 했지요.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방랑기를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막내아들은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유전으로 물려받았나 봅니다.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와 이혼하고 나서도 방랑기를 고치지 못하셨지요. 저와 단 둘이 살아도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셨지요. 그럴 때마다 산골 집에 홀로 남은 저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밤새 기다리며 그 지독한 외로움과 캄캄한 어둠의 공포에 질려 울고 또 울었답니다.

ⓒ 박상규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떠났지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가 어린 저는 무척이나 그리웠답니다. 저는 몇 날 며칠을 산골 집 앞 언덕에 앉아 울면서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끝내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때 울며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저의 기억은 아직도 뚜렷하게 삶의 생채기로 남아있답니다. 잊으려고도 해봤지만 잊혀지지 않더군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 깊숙한 곳이 바늘에 꾹 찔린 것마냥 아프고 눈에 물기가 맺히곤 한답니다.

ⓒ 박상규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고,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의 무게라는 것을 너무 일찍 가르쳐 주셨지요.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도 알다시피 저는 지금도 눈물이 많고 어린애마냥 훌쩍훌쩍 울 때가 많습니다. 참 이상한 건, 그 때나 지금이나 외로움이라는 걸 많이 싫어하면서도 외로움을 찾아 나서는 저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저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삶의 위안을 얻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떠나가고, 형과 두 누나마저도 산골을 떠나 어머니에게로 갔을 때. 저는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어린 저는 떠난 엄마가 형과 누나마저 내게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답니다. 서툴고 투박했지만 저는 곧 엄마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 그리움도 사라졌습니다.

ⓒ 박상규

어머니의 자리는 내 마음에서 조금씩 사라졌고, 저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저는 서로 멀어져 갔고, 그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지요. 도시의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잠깐 어머니 곁에서 살게 되었을 때. 그 때가 어머니와 제가 가장 크게 충돌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어머니와 저는 쉽게 친해지지 않았지요. 저는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머니 또한 사사건건 부딪치는 저에게 많이 불편해 하셨지요. 저는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새벽에 학교에 가는 저에게 아침밥도 차려주지 않고, 도시락도 챙겨주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컸습니다.

ⓒ 박상규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엄마와의 생활을 포기하고 저는 학교 옆에서 독서실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지요. 저는 책가방에 젓가락 한 쌍만을 넣고 다니며 학교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며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 때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배운 것 같습니다.

대학에 갔을 때 어머니는 제게 등록금은 물론이고 용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형과 누나를 위해서는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셨지만 저에게는 언제나 인색하셨지요. 저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방학 때마다 공사장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남들보다 1년 늦게 졸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많이 힘들었고,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극에 달했답니다.

ⓒ 박상규

어느 해 겨울. 저는 어머니 방에 들어가 주무시는 어머니를 깨워 강하게 대들었던 적이 있었지요. 도대체 내게 왜 그러냐고, 왜 나에겐 등록금도 주지 않느냐고 누워 계신 어머니에게 버릇없이 따지고 들었지요. 그 때 어머니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저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상규야, 미안하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니…. 내가 부모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다니…. 나는 지금까지 부모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는데, 내가 뭔데 그런 말을 부모에게 들어야 하나… 저는 그 때 밖으로 나가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장 죄송스러웠던 날이었습니다.

ⓒ 박상규

어머니는 제게 말씀 하셨지요. 잘난 자식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고, 또한 큰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잘 해나가더라고. 그런 자식이 바로 저였다고. 당신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한 막내아들이 잘 커가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셨다고 했지요. 저 녀석은 그냥 저렇게 스스로 자라게 내버려두어야 더 강인하게 성장할 것 같았고, 그래서 마음은 아팠지만 저를 그냥 세상에 풀어놓으셨다고 하셨지요.

그래요. 어머니가 저를 강하게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저를 세상에 그냥 풀어 놓으셨다고 했지만, 저를 키운 건 어머니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어머니는 외로운 분이셨지요. 전쟁으로 당신의 부모님을 모두 잃고 고아로 외롭게 사셨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방랑기 많고, 바람기 많았던 아버지에게서 삶의 위안을 받지 못 했겠지요. 돌아보면 어머니야말로 언제나 혼자셨습니다. 지독하게도 외로운 삶을 살았던 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살아오시면서 느끼셨을 외로움의 무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막내아들이 스물 아홉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겪으셨을 외로움을 헤아려 봅니다.

ⓒ 박상규

제가 걸으며 담아온 동강이 맘에 드시는지요. 서두에도 잠깐 말했지만, 강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아 안고 소리없이 조용히, 그러나 한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저 강은 어머니의 삶과 같습니다.

저는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았고, 보아야 할 세상도 많이 남았습니다. 제 여행은 이제야 시작입니다. 어머니 바람대로 건강하게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어머니를 위한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꼭 건강하게 돌아가겠습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