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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여러분들께 잠시 양해 말씀 구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러분께 장마철에 하나쯤 가지고 계시면 좋은 비옷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전 열한 시, 지하철 5호선의 한산한 객차 안. 노란 비옷을 머리부터 팔끝까지 걸친 진아무개(41)씨가 구성진 목소리로 제품 설명을 하고 있다. 심지어 비옷을 펴 양쪽으로 탁탁 잡아당기면서 찢어지지 않고 질기다는 설명도 한다. 객차 안에 에어콘이 가동되는데도 그의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진씨가 지하철 행상을 시작한 지는 햇수로 3년째. 서울 지역에만 300여 명에 달하는 지하철 행상 가운데 1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들도 허다하기에 진씨는 아직 초보 '기아바이'(지하철 행상을 뜻하는 은어)다.

20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진씨는 출소 후 취직할 곳이 마땅찮았다. 잠깐 공장일을 해보았지만 "사십 다 된 나이에 남들 밑에서 일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서" 이 일을 시작했다. 지하철 행상에서 경험을 쌓은 뒤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한 개에 천 원 하는 돋보기를 파는 김아무개(남·50)씨. '프리랜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지하철 행상을 하면서 용돈도 벌고, 사업 구상 겸 유통테스트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일석삼조.

한때 큰 사업을 벌이기도 했던 김씨는 지하철 행상을 통해 재기를 노리고 있다. '단가 치기'(제품을 설명하는 것을 뜻하는 은어)를 여러 방법으로 해봄으로써 소비자들의 심리를 좀더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고 소비 유형 전반을 알 수 있다는 것. 김씨는 "열에 두 셋은 대학까지 나왔을 것"이라며 "경기가 나쁜 요즘엔 이 일을 통해 우선 숨통을 틔우면서 사업 구상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고 귀띔했다.

지하철 상인 중에는 여성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남편의 실직으로 직접 직업전선에 나서거나, 점점 불어나는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뛰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5호선을 오가는 지하철 행상들이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거나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한 역사. 여기서 한 삼십대 여성을 만났다. 그는 얼마 전까지 명함첩을 팔다가 최근 장마가 시작되면서 삼천원짜리 우산을 주로 팔고 있다.

"돈 있으면 이 고생 하겠어요? 애가 셋인데 교육비가 만만찮아요. 돈 없다고 우리 애들만 안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파출부를 하면 시간에 너무 얽매여 애들 돌보기 어려우니까 비교적 자유로운 이 일을 하는 거죠. 큰 돈은 못벌어도 애들 교육비는 댈 수 있어요."

이 여성은 보통 오전 11시쯤에 나와 오후 2, 3시까지 일하고 퇴근한다. 보통 지하철 행상들은 오전 10시나 11시쯤에 출근해 오후 5시에 마친다.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 혼잡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여성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아이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장사를 파한다. 이 여성은 열차가 도착하기 무섭게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하철 행상에게 물건을 대주는 유통사무실은 동대문 부근에 밀집해 있다. 중국에서 싼 값에 대량 수입해 지하철 행상들과 노점 등에 물건을 공급한다. 물건은 없는 게 없다. 칫솔·고무장갑·빗·밴드·건전지 등 생활 용품에서부터 부채·우산·선풍기 덮개·털장갑·손난로 등 계절 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각종 사회 흐름에도 민감해야 한다. 지난 2월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에는 휴대용 손전등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천원에 세 개하는 플라스틱 빗에서부터 만원하는 어학용 카세트까지. 그러나 만원을 넘는 제품은 없다. 저렴함으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장에서 유통사무실, 기아바이로 유통되기 때문에 중간 마진이라는 게 없어요. 원가가 워낙 싼데다 유통단계도 적으니 값이 쌀 수밖에 없잖아요."

비옷을 팔던 진씨의 말이다. 보통 천원짜리 물건을 팔면 이들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400원 정도. 원가 5, 기아바이 4, 사무실 1의 비율이다. 진씨에 따르면 이들의 하루 수입은 보통 3~4만원 선이란다.

"한창 잘 나갈 때는 하루에 십만원 이상 매상도 올리곤 했다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요. 끝물인 것 같단 생각도 들고. 돈들이 없는지 손님들이 잘 사지도 않아요. 밑천 잡을 정도는 아니예요. 단속도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지하철 행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단속반. 현행 철도법 상 지하철 내에서의 물건 판매 행위는 금지돼 있다. 청원 경찰과 공익근무요원들로 구성된 일명 '질서기동반'이 뜨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요즘은 단속반들이 매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단다.

"오늘 첫차에 강동 가서 '딱지'하나 뗐다"는 43세의 남성. 한 권 팔면 150원 남는다는 한문책을 파는 그는 "마수걸이 하기도 전에 3만원씩이나 하는 '딱지'를 떼이자" 흡연이 금지된 역 내임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태웠다. 지하철 행상들 사이에서는 '딱지'를 아예 원가에 넣고 계산하기도 한다. 그것이 차라리 속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떨 땐 차라리 딱지 하나 떼이는 것이 속 편할 때가 있어요. 장사하다 아는 사람을 보면 난감하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문책을 파는 이 남성은 장사 초기에 아는 사람과 마주치고는 집에 돌아가서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고 했다.

생계를 잇기가 어려워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는 그는 "가족이 다시 모일 날을 생각하면 힘이 나다가도 가끔씩 '단가치기' 중에 아는 이와 눈이 마주치면 맥이 빠진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의 직업이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단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에 '삶의 터전'이란 이미지가 보태졌다. 시내버스보다 흔들림도 덜하고 승객도 많아 물건을 팔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하고 싶은데도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서,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정도로 생계 유지가 어려워서 지하로 내려왔다는 사연들을 그냥 간과할 수만은 없다.

저마다의 용무에 바빠 냉담한 승객들 앞에서 목청을 돋우워 "잠시 양해의 말씀을 구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이들의 용기있는 모습에서 비장한 삶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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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의 기자만들기> 18기 김윤정입니다. 강의를 듣고 시민기자로 활동하지 않는다면 제 자신에게 부끄러울 것 같아 등록합니다. 기사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르포나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곳, 주변 사람들의 소소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등을 찾아 기사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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