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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1년 임정 입국 환영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장갑차량을 타고, 군용 트럭을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 권기봉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세밑에 하는 일 중에는 신년 계획이나 망년회도 있지만 신년에는 '빨간색' 연휴가 며칠이나 되는지 세어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처럼 정신 없는 세상에 거저 생기는 휴일이니 비단 필자만의 경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깝게도(?) 지난 4월 5일 식목일은 평일이 아닌 토요일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여행을 하거나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까운 하루'가 날아가던 순간. 그래도 이 하루가 너무 아까웠던 것일까, 심지어 모 기관에서는 연휴를 확실히 챙기기 위함인지 식목 행사를 며칠 앞당겨 실시, 식목일 당일에는 '완전한 하루'를 챙기지 않았다던가.

사람들이 이리저리 이용해 먹든 본래 의미가 퇴색됐든 그래도 식목일은 행복한 신세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매년 4월 5일은 식목일이라는 존재쯤은 알아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날일지라도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될 수 없는 처지의 기념일들은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에서 사라진 임정 수립기념일

오는 13일(日)은 대한민국이 그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수립된 지 84돌을 맞는 날이다. 임정의 한때 지리멸렬했던 모습이나 해방 정국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1운동 이후 일제 치하 26년을 머나먼 이국 땅에서나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정진했다는 것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부분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 임정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경교장과 현 4.19기념도서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무로2가 65-4번지를 찾아가면 쓸쓸한 봄을 보게 된다. 이후 신도호텔로 이름이 바뀌고 현재 신한은행 충무로지점이 들어서 있다.
ⓒ 권기봉
그러나 우리 주위에 이날을 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에 이르러서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임정 수립기념일이라는 것이 임정 요인의 후손이나 정부의 행사 담당자 정도에게나 의미 있는 날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을까. 4.19혁명 기념일이나 8.15광복절은 그나마 날짜에서 기념일 이름을 쉽게 연상할 수 있지만 임정 기념일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쥐도 새도 모르게' 환국한 임정

그런데 지금에 비해 막 해방을 맞던 1945년 당시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한 상황에서 '임정 봉대론(奉待論)'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임정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정작 이들의 환국(還國)은 말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00여일이 지난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은 지루한 기다림과 우여곡절 끝에 환국한다. 그러나 당시 이 소식을 알고 있는 이는 임정 환국 준비를 위해 구성된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는 물론 서울 하늘 아래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임정 요인 제1진의 환국 사실을 알 수 있던 것은 조선 주둔 미군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의 "오늘 오후 김구(金九)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라는 성명을 통해서였다.

물론 이는 임정 요인들이 이미 경교장(京橋莊)에 도착한 이후였고 꽃다발을 든 환영 인파나 카 퍼레이드 등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인의 자격으로' 환국해 하지 중장의 성명을 통해 임정의 존재가 발표된 것도 의아하지만, 정작 임정이 어떻게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를 따라가 보면 더욱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 권기봉
이를 위해 장준하(張俊河)의 <돌베개>(세계사, 2001)를 보자. 임정 주석 김구의 수행원 자격으로 제1진과 함께 조국 땅을 밟은 장준하는 1971년 자신의 일본군 병영 탈출과 임정 참여, 환국 후의 국내 상황 등을 담은 자서전 <돌베개>를 출간한다. 그는 미군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 밖이 잘 보이지도 않는 장갑차량을 타고 서울로 '호송'되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미군 GI(필자 주: '미군'을 의미)들뿐이었다." (339쪽)

"나부끼는 태극기, 환성의 환영, 그 목 아프게 불러줄 만세소리는 환상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고 거무푸레한 김포의 하오(下午)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339쪽)

"탱크처럼 된 장갑차 여섯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GI들이 정렬해 있었고 시무룩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표정에 우리들의 시선이 닿자, 우리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340쪽)

"차창으로 농부가 보였다. 흰옷 입은 백의의 농민이 소를 몰고 길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태극기를 앉은 채로 올려서 그 농민에게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지당하고 말았다." (340쪽)

"아무라도, 맨 먼저 만나는 농부에게라도, 맞붙잡고 실컷 울고 싶건만, 그러나 우리는 미군의 작전대상물로 장갑차에 실려 가고 있다." (340쪽)


지루한 인용의 남발로 읽힐지는 모르지만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제1진의 환국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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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 오른 학도병, 힘없는 조국에 흐느끼다

▲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백여 일이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이 환국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성명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환국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 권기봉
"소를 앞세우고 무심코 길을 비키는 농부, 그 농부는 아마 미군용차가 많이 지나가는구나, 이렇게 혼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행렬 속에 김구 주석이, 삼천만의 희망이며 혁명투사인 민족의 지도자가 들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하리라. 안타까움이 농부의 표정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내가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 답답한 노릇이 조국의 운명을 끝까지 기막히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341쪽)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제1진 15명에 이어 제2진으로 신익희(申翼熙) 등 19명이 같은 해 12월 2일 옥구비행장을 통해 환국한다. 삭풍이 부는 12월, 활주로에 내린 이들 앞에 놓인 차는 그나마 사방이 꽁꽁 막혀 바람이라도 막아줄 장갑차량도 아니고, 먼지와 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군용 트럭이었다. 이들의 비참한 환국 풍경을 보노라면 오히려 제1진의 처지가 너무나 품격 있게 느껴질 정도다.

"모두들 손발과 뺨살이 얼어 얼얼했고 눈썹과 머리엔 흙먼지가 뽀얗게 얹혔으며,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앞뒤좌우로 시달린 이분들은 모두 차를 내려서 손발을 녹이고 있었다." (400쪽)

"논산에 닿은 것은 밤이 어두워서였다. 트럭으로 몰려오는 바람을 다 안고 달려서 읍내의 한 여관에 겨우 몸을 눕힌 것이 10시. 먼지투성이의 한 무리들이 미군 트럭에서 내려 망측스런 꼴을 하고 들어섰을 때 그 여관의 주인이나 사동들도 조금도 이들의 신분을 상상도 못했으리라. 이들은 아무 말도 않고 하룻밤만 묵고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환국 제2진의 제1야는, 한 이름 없는 작은 여관방에서 지냈다." (400~401쪽)


▲ 임정은 잊혀졌다. 한미호텔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일까?
ⓒ 권기봉
왜 머나먼 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깃발과 함께 환호하는 인파는커녕 이렇게 비밀리에, 그것도 서글프다 못해 비참한 모습을 보이며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까? 쉬우면서도 간단치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번화가 명동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없었다

제1진으로 환국한 김구와 김규식(金奎植), 이시영(李始榮) 등 15명과 제2진으로 환국한 조소앙(趙素昻)과 김원봉(金元鳳) 등 19명, 일단 1945년 12월까지 환국한 이들은 모두 34명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간 고국을 떠나 있었던지라 갑작스런 환국에 이들이 머무를 곳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들의 숙소를 구해준 것은 제1진의 환국도 하지 중장의 성명을 통해서나 알 수 있었던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였다. 일제 당시'광산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대부호였던 최창학(崔昌學)이 자신의 친일 경력을 희석시킬 목적으로 기부한 경교장과 그 근처에 있던 현 4.19기념도서관 터의 건물, 마지막으로 충무로2가에 있던 한미호텔 등 모두 세 군데를 임정 요인들의 숙소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교장은 김구가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을 당한 장소이자 겉모습만은 지금도 남아 있어 적지 않은 이들이 그 존재를 알고 있고, 4.19기념도서관도 이기붕의 집이 있던 자리이기에 그 자리만큼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한미호텔’ 터 찾아가는 방법
번화가 명동으로 떠나자!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간다. 그럼 바로 출구 밖에 24시간 편의점 ‘미니스탑’이 보이며 그 오른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명례방길’이다. 그리로 들어가 1분도 채 지나지 않으면 네거리가 나타나는데, 들어온 골목의 왼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신한은행’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했을 때 머물렀던 건물 중 하나인 한미호텔이 있었던 자리다.
/ 권기봉
그런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기념일답게 관련 유산도 홀대받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유독 세 곳의 숙소 중 하나인 한미호텔만은 그 존재가 묘연했다. 어느 자료를 뒤져보아도 한미호텔이 '충무로에 있었다' 혹은 나아가 '충무로2가 100번지에 있었다'는 말은 있지만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충무로2가에는 현재 66번지까지만 있을 뿐 100번지라는 지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

▲ 해방 이전인 1937년 간행된 <대경성사진첩>에 실려 있는 혼마치호텔의 사진으로, '본정2정목 100번지'라고 나와 있다. 일부에서 말하는 '충무로2가 100번지'는 이곳을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 대경성사진첩
모처럼만에 봄비가 내린 이른 아침, 일단은 '충무로2가 100번지'라는 단서만 손에 쥐고 길을 나섰다. '혹시나'했으나 '역시나'였다. 충무로2가 100번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번화가인 명동답게 사람들도 참 많았는데 일단은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있는 상점을 찾아 들어가 '충무로2가 100번지' 혹은 '한미호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 등을 끄집어내며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는 이는 없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주소를 모를 때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부동산 중개소였으나, 번지 자체가 존재하질 않으니 역시나 다리만 축낼 뿐.

그래서 생각한 것이 명동 동사무소와 충무로2가가 속해 있는 서울 중구청. 명동 동사무소에 문의한 결과 "현재 100번지는 존재하지 않고 66번지까지만 존재할 뿐"이라며 "이전에 130번지인가를 찾는 사람도 있었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는 답변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서울 중구청이나 중구문화원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그저 "70년대 초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면서 번지수 통폐합이 일어나서 그런 것 같다"는 막연한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 '정확한 행정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인정하자.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은 각종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록이 시원찮다면 경험에라도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임정이 환국한 때가 1945년이니 이 일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7~80대의 노인을 찾으면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 같았다. 게다가 임정 환국 직후 일반인들의 기대와 환영이 남달랐으니 기대해볼 만도 했다.

해결책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왔다. 해방 당시 본정경찰서(현 서울 중부경찰서)에 있었다는 명동경로당 회장 박규원씨(84세)는 "지금 신한은행 건물 자리가 이전에 한미호텔이 있던 자리였던 것 같다"는 기억을 되살려냈다. 확인 결과 '충무로2가 100번지'라고 알려진 한미호텔 자리는 현재 신한은행 충무로지점이 위치한 충무로2가 65-4번지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 1929년 간행된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에 실린 한미호텔 인근 지도. 현 퇴계로는 1930년대 후반 '소화통'이라는 이름으로 개통되므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이 일대의 모습이 지금과 거의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의 108번지 앞 네거리가 현 '밀리오레' 앞 네거리이며, 그 길을 따라 걸으면 현대투신증권(옛 명동시공관 자리)이 나온다.
ⓒ 경성부일필매
물론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의 파병 동의안 통과, 북한 핵문제의 대두, 전례 없는 경기 침체 등 국내외 상황이 여유롭지 않은 지금, 한미호텔 터나 확인하러 길을 나서는 등의 한가한 답사는 무의미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재가 곧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던가.

얼마 전 헐려버린, 헐려버릴 뻔한 최남선(崔南善) 생가와 고희동(高羲東)의 집은 차차 당시 예술인들의 친일에 대한 기억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갈 것이며, '역사바로세우기'를 외치며 보무도 당당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었건만 정작 헐린, 헐릴 것은 우리와 후대가 기억할, 기억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래, 괜히 어려운 이야기는 말자.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면 차차 잊혀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그거야 그 사람의 인생에 국한된 문제라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글을 남기고 사진을 남긴다 한들 직접 보는 것에 비하랴. 지금이라도 신한은행 충무로지점 앞에 표지석 하나 세워볼 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하는 강북 상권의 중심 명동. 그러나 명동의 봄이 그리 화사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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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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